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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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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네 편이 되어주겠다”로 이어지는 연대가 필요해

한국에서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이 뜨겁다. 두쫀쿠 한 입이 혈당을 확 끌어올릴 만큼 달고 진한데도 사람들은 그 자극을 위로처럼 찾아다닌다. 한 입 베어 물면 쫀득하고 바삭한 식감이 동시에 터지고, 사진과 영상으로 옮기기 좋은 비주얼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운맛 열풍이 있었다. 혀가 얼얼해질수록 “오늘도 버텼다”는 기분을 나누는 문화가 생겼고, 누군가는 그 매운맛을 스트레스의 배출구로 삼았다. 맛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흐름은 같은 곳을 향한다. 자극은 언제나 마음의 빈자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꽤 허기지다.
요즘의 음식 트렌드는 단순히 “뭐가 맛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먹는 행위가 감정을 번역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불안하다, 답답하다, 미래가 막막하다는 말을 길게 풀어내기엔 우리는 너무 지치고, 사회는 여전히 감정을 설명하는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감정은 맛으로 우회한다. 매운맛은 말로 못 내뱉는 분노와 압박을 대신 내뱉게 하고, 달콤하고 과장된 식감은 지친 마음을 잠깐이라도 달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자극적인 음식은 감정의 스위치를 잠시 바꿔주는 손쉬운 장치가 된다.
또 하나의 배경은 관계의 변화이다. 1인 가구가 늘고 혼밥이 일상이 되면서, 식탁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예전에는 밥상머리가 하루의 온도를 나누는 자리였다. 국을 떠주고, 얼굴을 보고, 말이 막히면 침묵도 함께 견디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의 식탁이 비면 화면이 그 자리를 채운다. 먹방과 소셜미디어 속 트렌드 음식은 심리적 허기를 잠깐 달래준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느낌을 흉내 내고, 유행에 참여했다는 소속감을 준다. 그러나 화면 속 공동체는 따뜻해 보여도 나를 알아주지는 못한다.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내 눈빛을 읽지 못하고, “괜찮냐”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매운맛 열풍에서 나타난 ‘고통의 연대’가 이해된다. 취업난과 경쟁,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청년들은 매운 음식을 통해 현실 감정을 공유하고 해소한다. “나도 힘들다”를 직접 말하기 어려우니 “나 이 정도 매운 것도 먹는다”로 돌려 말한다. 함께 맵부심을 나누며 서로를 확인한다. 연대이긴 하다. 하지만 슬픈 연대이기도 하다. 고통을 나누는 연대는 있는데, 삶을 함께 건너는 연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극을 함께 소비하는 것으로는 내일을 살려낼 손이 되기 어렵다.
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교회는 다시 식탁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말씀과 기도만이 아니라 함께 떡을 떼며 삶을 나눴다. 식탁은 친교 프로그램이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를 몸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오늘의 교회는 자리는 많지만 식탁이 적다. 자리는 앉는 곳이고 식탁은 마음을 내려놓는 곳이다. 행사로 모으는 것보다 작은 밥상을 반복해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예배 후 인사로 끝내기보다 “요즘 잠은 자냐”는 질문이 필요하다. 정답을 건네기 전에 사연을 끝까지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는 트렌드를 비웃지 말아야 한다. 두쫀쿠나 매운맛을 “요즘 애들 유난”으로 치부하는 순간, 교회는 시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친다. 트렌드는 욕망의 포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핍의 언어이기도 하다. “자극이 없으면 못 버틴다”는 말은 삶의 통증이 크다는 뜻이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관계가 피곤할 만큼 상처가 많다는 뜻이다.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다. 교회는 이 신호를 복음의 언어로 번역해 줘야 한다. 판단이 아니라 해석으로, 훈계가 아니라 동행으로 응답해야 한다.
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연대를 소망의 연대로 바꾸는 일이다. 매운맛이 잠깐의 엔도르핀을 줄 수는 있다. 달콤한 디저트가 한숨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잠깐의 자극이 아니라 지속되는 관계이다. “누구나 다 힘들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은 내가 네 편이 되어주겠다”로 이어지는 연대가 필요하다. 그 연대는 대형 프로그램이 아니라 습관에서 시작된다. 한 주에 한 번 함께 밥을 먹는 습관,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습관, 결석을 영적 나태로 단정하지 않고 삶의 파손으로 읽는 습관이 필요하다.
소통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교회가 다시 식탁을 회복할 때, 화면이 대신하던 위로를 사람의 얼굴이 건네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소통하는 교회’는 유행을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라, 시대의 외로움에 대답하는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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