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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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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존재의 이유를 다시 묻게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9.16
    LA통합교육구(LAUSD)가 학교 통폐합과 폐교를 포함한 재편을 논의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2002~03학년도 70만 명이 넘었던 학생이 이제 40만 명 아래로 내려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옮긴 결과가 아니다. 출생률이 낮아졌고, 주거 형태가 달라졌으며, 가족들의 이동도 계속되고 있다. 학교가 변하기 전에 학교를 둘러싼 사회가 먼저 변한 것이다.그래서 LAUSD가 생각해낸 해결 방법은 학생이 적은 학교를 합치거나 폐교하고, 남는 캠퍼스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그러나 학교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건물 하나의 문을 닫는 것과 다르다. 그곳을 졸업한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것이고, 그 동네에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연결하던 공간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폐교는 숫자로 결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숫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교회도 사람이 줄고 있다. 이것은 몇몇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나 한국 기독교가 함께 경험하고 있는 변화다. 그렇다면 학교처럼 교회도 사람이 적어지면 합치거나 문을 닫으면 되는 것일까.학교와 교회는 다르다. 학교는 학생 수에 따라 시설과 인력, 예산을 조정해야 하는 공교육 체계 안에 있다. 교회는 사람의 수에 맞추어 효율성을 높이는 것만으로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공동체다.특히 미주 한인교회는 더욱 그렇다. 이민 초기의 한인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었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나누고, 자녀를 키우며 낯선 땅에서 삶을 함께 견디는 곳이었다. 교회는 이민생활의 한가운데 있었다.그러나 그 환경이 달라졌다. 이민 1세대는 고령화되고 다음 세대의 언어와 문화, 생활방식은 달라졌다. 한인교회가 담당했던 여러 기능도 이제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다.그런데 사람은 달라졌는데 교회가 여전히 예전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그래서 사람이 줄어드는 것보다 먼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소통은 달라진 사람에게 교회를 이해시키는 일이 아니다. 교회가 달라진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다.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달라진 사람들에게 오늘의 교회는 왜 필요한가. 과거에 교회가 필요했던 이유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교회가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한다. 복음은 달라질 수 없지만, 복음을 품고 사람을 만나는 교회의 모습까지 언제나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어쩌면 교인 수의 감소는 교회의 위기를 보여주는 숫자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질문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 모을 것인가를 묻기 전에, 지금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교회인가를 물어야 한다.소통은 그 질문에 교회가 먼저 답하는 것이 아니다. 달라진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듣고, 그 앞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사람이 떠난 다음 숫자를 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달라지고 있을 때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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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믿음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의지한다. 건강을 의지하고, 재물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한다. 그러나 건강도 잃을 수 있고, 재물도 사라질 수 있으며,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할 때도 있다.그렇다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게 하고,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한다.마가복음 5장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고, 가진 재산도 모두 허비했다. 그러나 병은 낫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건강과 재산을 잃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단절됐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그런데 이 여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소문이 여인의 마음에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희망은 믿음이 됐다. 여인은 생각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옷자락을 만졌다. 그 순간 12년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병이 나았다.무엇이 이 여인의 인생을 바꾸었을까? 돈이나 사람의 도움도 아니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었다. 물론 여인을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믿음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붙드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는 것이다.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행동했으며,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경험했다.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며, 열심히 살아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사람의 가능성이 끝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역사할 수 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신뢰하며 끝까지 주님을 붙드는 것이다.특별히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은 여인의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여인을 향해 "딸아"라고 부르셨다. 병든 몸을 고쳐 주셨을 뿐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잃어버린 평안까지 회복시켜 주셨다.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다. 주님은 문제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다. 사람들은 여인의 병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믿음을 보셨다. 사람들은 여인을 멀리했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다. 사람들은 그녀의 과거를 보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셨다. 믿음 하나가 병든 몸을 회복시키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며, 무너진 인생을 새롭게 했다.오늘 우리 사회에도 혈루증 여인처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낙심한 사람, 관계의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로의 말만이 아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이며, 그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세상 속에서 희망을 전해야 한다.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품어 주고, 상처를 더하기보다 치유하며,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오늘날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이러한 믿음이다. 교회의 규모나 재정, 화려한 프로그램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 있는 믿음이다. 믿음이 살아나면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가 살아나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도 살아난다. 그 믿음이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날 때 교회는 다시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혈루증 여인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갔고,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상황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듣고,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이 필요하다.세상은 불가능을 이야기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보게 한다. 세상은 절망을 말하지만 믿음은 소망을 말하게 한다. 세상은 끝났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게 한다.인생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많은 돈이나 좋은 환경, 특별한 기회만이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꾼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믿고 의지하느냐에 있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살아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믿음 하나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믿음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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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에드워즈의 ‘최고 목적(Ul’… 크리스천헤럴드2026.10.20
    미주 한인 사회에는 자주 회자되는 고백이 있다. “미국에 와서 모든 것을 이루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요.” 좋은 집, 안정된 직장, 자녀의 명문대 입학, 원하던 것을 다 이루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다. 이 허전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무언가 더 근본적인 것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증거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 질문 앞에 평생 하나의 일관된 답을 붙들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이며, 그것만이 참된 행복의 원천이다. 그는 이 진리를 추상적 교리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살아냈다. 그리고 그 삶은 오늘 디아스포라 교회에 여전히 선명한 울림을 남긴다.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최고 목적(Ul’mate End)’이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근원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평생 탐구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하나님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 자신 즉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고 피조물과 그 영광을 나누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창조의 근본 이유다. 어거스틴이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했듯, 이민의 삶에서 느끼는 그 허전함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의 대표작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대한 논고』(A Disserta’o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체계적으로 논증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흘러넘치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피조물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 창조의 근본 이유다. 성공, 명예, 안락함은 그 목적에 이르는 도구일 뿐 목적 자체가 될 수 없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수단을 목적으로 혼동하며 살아가게 된다. 에드워즈의 ‘최고 목적’ 신학은 개인의 영적 만족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사명으로 흘러나간다. 에드워즈 자신이 이를 삶으로 증명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그는 화려한 도시 대신 변방의 인디언 선교지 스톡브리지를 선택했다. 소외된 공동체를 섬기는 그 자리에서 그는 역사에 남을 신학 저작들을 써 내려갔다. 삶의 자리가 선교의 자리였고, 선교의 자리가 신학의 자리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고, 약한 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연스럽게 힘쓰게 된다.  이것은 디아스포라 교회에 깊은 도전을 던진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위해 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성공이 목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목적인가?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이민자를 돕는 일상의 행위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고 목적의 실천이다. 거창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배어 나올 때, 그것이 세상을 향한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정체성은 문화와 국적을 초월하는 든든한 기반이 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어떤 환경에 있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작은 헌신이 쌓이고 이어질 때, 한 가정의 이야기가 한 공동체의 이야기가 되고, 한 세대의 이야기가 다음 세대를 움직이는 불씨가 된다. 당신은 왜 이 땅에 왔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바로 그 안에서 인간은 참된 기쁨과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이 단순한 생존이나 성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한가운데서 드러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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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김광근 31 -사막의 떨기나무인가, 은혜의 물가에 심긴 나무인가 크리스천헤럴드2026.10.20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예레미야 17장 7절가뭄이 닥치면 인생의 밑천이 드러납니다.잎사귀의 무성함이나 화려한 겉모습은 타는 듯한 폭염 앞에서 순식간에 무력해집니다.유다 말기, 바벨론의 침략 앞에서 사람과 군사력을 의지하던 백성들을 향해 선지자 예레미야는 엄중히 경고했습니다.인간의 힘을 든든한 밑천 삼아 살아가는 인생은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아서, 메마른 소금 땅에 고립된 채 생명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내가 쥔 계산기와 인맥이 내 영혼을 지켜줄 궁극적 피난처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반면 여호와를 신뢰하며 온 존재를 내어맡기는자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이 나무라고 해서 더위와 가뭄을 비껴가는 온실 속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성도 역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경제적 위기와 육체의 질병, 막막한 인생의 밤을 통과합니다.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뿌리’에 있습니다.가뭄 한가운데서도 마르지 않는 지하 수맥에 닿아 있기에, 두려움 없이 잎이 청청하며 결실을 멈추지 않습니다.우리는 본래 광야의 떨기나무처럼 타는 목마름 속에 심판받아 마땅했던 죄인이었습니다.그러나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나무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사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그리스도께 믿음으로 접붙임된 자에게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마르지 않는 은혜가 공급됩니다.오늘 나의 영적 뿌리는 어디로 뻗어 있습니까?세상의 얄팍한 웅덩이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신 십자가 예수께 깊이 뿌리내릴 때 우리는 시대를 이기는 푸른 숲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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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7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삶, 광야에서도 자라는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6.10.20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다. 어제 받은 은혜가 있고, 오늘 새롭게 주실 은혜가 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은혜와 만나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된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하루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가지는 스스로 열매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는다. 나 역시 주님께 붙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깊은 안정감을 누린다.그러나 열매를 맺는 과정에는 가지치기도 필요하다.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야 건강한 성장이 가능하다. 우리의 삶에서도 내려놓아야 할 생각과 욕심, 두려움이 있다. 기도의 자리는 무엇을 잘라내야 하는지 깨닫는 시간이며,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은 메마른 영혼에 새로운 영양분을 공급받는 시간이다.기도에 대해 생각할수록 그 의미가 깊어진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자리다. 나 자신에게 머물던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내 생각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자리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지는 과정은 생각할수록 신비롭다.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은혜다.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시선도 작용한다.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의식하며 살아간다.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래도 괜찮아. 내가 너를 책임질 수 있으니까”라는 하나님의 위로를 믿게 되는 순간, 두려움의 무게가 달라진다. 사람들의 인정이 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자유를 누리는 일이 아닐까.사람은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린 시절에는 무엇을 듣고 자랐는지가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쌓일수록 지금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진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 관심이 머물고, 그 관심이 결국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신앙의 성장도 그렇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 새롭게 발견될 때가 있다. 익숙했던 말씀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다가 그때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은 언제나 새롭다. 그 설렘이 다시 살아갈 힘이 된다.물론 우리의 기대처럼 결과가 또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날도 많다. 열심히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우리를 빚어가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다.밤이 주는 은혜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잠든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루의 일을 멈추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아침이 되면 새로운 힘으로 일어난다. 내가 쉬는 동안에도 생명은 유지되고, 세상은 움직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또 하루가 찾아온다.인생에도 밤과 같은 시간이 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시간이다. 그때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비로소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밤이 있기에 아침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요즘 에이레네 사모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오래 머문다. 저마다의 사정 속에서 광야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분들이 있다. 광야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 이 시간이 끝날지 알 수 없는 막막함도 있다.그러나 성경 속 광야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고 의지할 것이 없어졌을 때, 사람은 이전과 다른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광야를 지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은혜가 있다.그렇다고 광야의 고통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의 외로움과 눈물을 쉽게 설명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견딜 힘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과 위로를 만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광야를 걷는 동안에도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열매가 아직 보이지 않아도 뿌리에서 공급되는 생명은 멈추지 않는다.오늘도 새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은혜를 오늘 발견하게 하시고, 내일의 일을 다 알지 못해도 평안히 오늘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하다.특별히 광야를 지나고 있는 에이레네의 모든 사모님들이 그 길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고, 마침내 자신에게 허락된 은혜를 발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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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류응렬 칼럼 -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무성한 여름 숲이 지나간 자리에 단풍이 내려앉는 가을이 오면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첫 연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하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머리를 숙이는 자리로 안내합니다. 가을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쳐 주는 가장 좋은 선생입니다. 봄은 푸름을 자라나게 하고, 여름은 온 세상을 푸름으로 가득 채우지만, 가을은 잠시 멈추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짧아진 햇살은 한 해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언젠가 인생의 겨울이 찾아온다는 것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이 가을에는 주님 앞에 깊이 나아가는 기도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무엇을 더 얻어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분주한 걸음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더 빨리 달려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산천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에 감사하고, 걸어온 날들을 돌아보며, 남아 있는 날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조용히 주님께 물어보면 좋겠습니다.시인은 두 번째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가을은 위로 올라가는 성장을 넘어 아래로 깊이 들어가는 성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계절입니다.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지,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릴 수 있는 날도, 자녀를 품어 줄 수 있는 날도, 친구와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날도, 교우들과 함께 예배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는 날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가슴에 새기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품고 배려하고 용서하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질수록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용서할 힘도 얻게 됩니다.시인은 세 번째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린 잠시도 가만히 있는 것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쁜 이 땅의 사역 가운데 예수님께서 자주 하신 일이 있습니다. 때로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잠시 사람들에게서 물러나셨고, 세상을 더 잘 섬기기 위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셨습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외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세상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번 가을에는 이 세 가지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기도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사랑으로 주님의 향기를 전하게 하소서. 홀로 있음으로 주님과 더욱 깊이 하나 되게 하소서. 가을이 깊어 갑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 안에서 더욱 깊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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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타인의 증언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이 시작되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갔다. 바다 가운데를 지나고 원수들의 멸망을 보며 위풍당당하게 애굽을 떠났지만,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고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한 불만과 원망을 쌓아 갔다. 차라리 애굽에서 살 때가 더 좋았다며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분노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벌하셨다.사백 년 동안 종으로 살다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길고 긴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긴 연단의 시간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구원의 하나님은 점점 잊혀지고,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만 크게 느껴졌다.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광야를 헤매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며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더욱 깊어졌다.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왜 고생을 시키시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평하는 사람들을 벌하시는 모습을 보며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백성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과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이처럼 백성의 믿음이 약해져 갈 때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발람과 발락의 사건이다.모압 왕 발락은 다가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기 위해 이방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세 번이나 그들을 축복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발람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직접 알려 주셨다. 그런데 그 말은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아름다운 민족인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민족인지,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복되고 밝은지를 선포하는 축복의 말이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실 때는 엄하시고 분노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단면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참된 마음이 무엇인지 발람의 증언을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발람의 축복을 통해 알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심이었다.우리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때로는 당사자의 말보다 제삼자를 통해 듣게 된 상대의 마음이 더 정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오해가 생기기 쉽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고, 바라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작은 일에도 섭섭해지고, 조금만 싫은 말을 들어도 상대의 진의를 잘못 헤아리기 쉽다.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렇다. 부모의 꾸중을 듣고 섭섭해하거나, 어떤 일로 인해 부모의 마음을 잠시 잊고 오해할 때가 있다.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부모의 속마음을 알게 되어 오해가 풀리기도 한다. 다른 이들을 통해 부모의 진심을 깨닫고 다시 마음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 오해로 인해  잠시 부모의 마음을 잘못 헤아렸을 뿐, 부모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다. 때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없어 시험에 들기도 한다. 왜 힘든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왜 이런 가혹한 상황에 두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실 때면 불안과 염려로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한다.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이 나를 향해 품으신 뜻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며 한결같으시다. 때로는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시고, 피하고 싶었던 역경과 고난을 지나게 하시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인도하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살다 보면 힘든 상황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겪는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실망스러운 결과를 마주할 때가 있고, 원하지 않았던 일을 겪기도 한다. 바라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사랑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때가 되면 깨닫게 된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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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당연한 것은 하나 없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오늘 주신 말씀은 창세기 12장 1~2절입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생각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던 복을 먼저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든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못한 채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에게는 충격적인 명령이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길을 통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이 말씀 앞에서 제 삶도 돌아봅니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사라질 때 살아갈 방향도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살아야 할 이유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감사합니다.그러면서 ‘사명’이라는 이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살펴봅니다. 우리에게서 명예욕과 권력욕, 물질에 대한 욕심을 걷어낸다면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순수한 사명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명이라는 이름 아래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영향력을 갖고 싶은 욕망을 숨기기도 합니다. 제 안에 숨어 있는 욕심들을 성령의 용광로에 녹여 불순물은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만 남기를 기도합니다.어제는 마음을 울리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수년 전 양손과 양쪽 발목을 절단한 한 사모님이 제가 쓴 감사문을 읽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주님, 나는 손가락이 없으니 내 손목을 잡아 주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주님, 이 사모님은 특별히 안고 가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그 사모님은 큰 신체적 불편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레네에 들어온 뒤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손가락이 없으니 손목을 잡아 달라는 기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없는 것만 바라보며 살아가는지 돌아보게 됩니다.우리 삶을 흔드는 질병과 어려움, 유혹과 시험도 계속 찾아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단단히 무장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더 충실히 감당해야겠다는 마음도 새롭게 다집니다.우리에게도 떠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욕심일 수도 있고 명예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으며 내려놓지 못한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길을 온전히 걸어가기 어렵습니다.에이레네 선교회 안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기쁜 일도 있고 가슴 아픈 일도 있습니다. 이제는 사건 자체에 매달리기보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묻고 싶습니다.“하나님,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오늘도 숨을 쉬게 하신 것, 말씀을 주신 것, 사명을 다시 생각하게 하신 것, 그리고 손가락 대신 손목을 내어놓으며 주님의 손을 구하는 한 사람의 고백까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오늘 하루 전체가 감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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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3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디아스포라는 선교의 최전선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안에는 오래된 자기 질문이 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민족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선교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방 땅에서 살아남기도 바쁜데, 선교는 여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 질문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선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통해 세상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선교신학 중심에는 Missio Dei, 곧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개념은 선교의 주체가 교회나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자신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셨고, 그 목적을 향해 역사 전체를 이끌어 오셨다. 교회와 성도는 그 하나님의 선교에 초대된 참여자들이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통찰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를 선교의 현장으로 삼으신다.  에드워즈가 Missio Dei 를 이해한 방식은 그의 역사신학과 깊이 연결된다. 그는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Fon)에서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의 거대한 선교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보내졌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으며,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흩어졌다.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략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흩어짐을 결코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열방 가운데 흩으심으로써 복음이 전달될 통로를 만드신다. 흩어진 자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그것이 곧 선교이다. 화려한 집회도, 특별한 프로그램도, 전문적인 훈련도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미 Missio Dei 에 참여하는 행위라는 것, 이것이 에드워즈 선교신학의 핵심 통찰이다.  이 통찰은 에드워즈 자신의 삶에서 검증되었다. 그가 스톡브리지의 인디언 선교지로 내려갔을 때,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좌천이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가 변방의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자원 낭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를 자신이 내려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인디언 아이들을 가르치고, 부족 장로들과 대화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동시에 인류 역사에 남을 신학 저작들을 남겼다. 삶의 자리가 선교의 자리였고, 선교의 자리가 신학의 자리였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를 이 렌즈로 다시 보자. 우리가 일하는 직장은 단순한 생계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우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다음 세대 선교사들이 훈련받는 곳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이웃들 즉 히스패닉 가정, 아시아계 이민자, 미국인 동료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선교의 대상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 자체가 이미 선교의 최전선이다.  에드워즈는 선교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했다. 하나는 선포의 선교(ProclamaFon)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선교(Presence)이다. 그는 두 번째 차원을 특별히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맛본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삶 전체에서 흘러나온다. 억지로 전도 문구를 외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이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빛이 된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였다. 디아스포라의 일상이 곧 선교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가진 독특한 선교적 강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미 두 세계를 살고 있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 미국의 사고방식과 네트워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 이중성은 때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지만, 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우리는 동양과 서양, 이민자 공동체와 주류 사회, 한인 교회와 다민족 교회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다.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으로 보면, 이 위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소명의 자리이다.  디아스포라 교회가 이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는 소수 공동체’라는 생존의 언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선교 공동체’라는 소명의 언어로 옮겨가야 한다. 이 전환은 단지 말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이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이고, 예배는 세상을 향한 파송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교회의 본질이었다.  이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이민자를 돕고, 지역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이 모든 일상의 행위가 Missio Dei 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부족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방식이 된다.  에드워즈는 Missio Dei 가 완성되는 날을 꿈꾸었다. 그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날, 모든 민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날을 향해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그 역사의 흐름 안에서 열방이 하나로 모이는 예표(豫表)가 될 수 있다. 한국인과 미국인, 히스패닉과 아시아인이 함께 예배하는 디아스포라 교회는 이미 그 종말론적 비전의 작은 선취(先取)이다.  선교는 멀리 가는 것만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에서, 스톡브리지에서, 그리고 프린스턴에서 그것을 살아냈다. 그 자리들이 각각 그에게는 선교의 최전선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즉 로스앤젤레스의 식당, 뉴욕의 병원, 달라스의 교실, 시카고의 사무실이 우리의 선교 최전선이다.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을 붙든다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뿐 아니라 이 땅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미국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선교지이다. 한인 교회는 한인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열방을 품는 선교적 공동체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생존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의 한 페이지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멈추지 않는다. 그 선교는 아브라함의 이주에서 시작하여 초대 교회의 흩어짐을 거쳐,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까지 흘러왔다.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선교의 최전선이다.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그것이 바로 디아스포라로 부름받은 우리의 소명이다.  디아스포라는 실패한 이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선교 전략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이미 선교의 최전선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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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2
    [오피니언] The letter 김광근 30 - 마음의 파수꾼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 잠언 4장 23절현대인은 외벽을 쌓는 일에 필사적입니다.자산 규모를 늘리고 건강 수치를 관리하며 평판의 방어벽을 높이 두릅니다.그러나 정작 삶의 사령탑인 내면의 문은 무방비로 열어둔 채 살아갑니다.잠언 기자는 단호하게 경고합니다.“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여기서 ‘지키라’는 히브리어 ‘미쉬마르(מִשְׁמָר)’는 적군의 기습을 막아내기 위해 성벽 위에서 눈을 부릅뜬 보초의 파수를 뜻합니다.수원지가 오염되면 흘러가는 모든 실개천이 죽음의 독수로 변하듯, 마음이라는 샘물이 탁해지면 겉으로 쌓아 올린 성공도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집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도덕적 결단으로내면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낙관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우리의 본성은 부패하여(렘 17:9) 스스로 파수꾼이 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를 쏟으사 더러워진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단번에 정결케 하셨습니다.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돌 같은 심장을 제하고 성령의 새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참된 평안은 외부 환경을 완벽히 통제할 때 오지 않습니다.그리스도의 보혈을 심령의 문설주에 바르고, 주님을 영혼의 참된 파수꾼으로 모셔 들일 때 비로소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삶 전 영역으로 힘차게 흘러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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