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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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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에드워즈 연구,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놓쳤는가?>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 1758)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를 충분히 연구해 왔는가, 아니면 어떤 중요한 측면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가?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꾸준히 축적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분명한 특징이 드러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밝혀 왔지만, 동시에 중요한 부분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 연구는 이미 방대한 규모에 이르렀다. 노스이스턴대학교의 M. X. 레서(M. X. Lesser)가 정리한 문헌 목록에 따르면, 1729 년부터 2005 년까지 3,000 편이 넘는 연구가 출판되었다. 특히 20 세기 후반 이후 연구는 더욱 활발해지며, 에드워즈는 신학을 넘어 철학, 문학, 윤리학, 미국 지성사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특정 시대의 종교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신앙, 세계를 이해하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연구 동향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ProQuest 데이터에 따르면, 2000 년부터 2020 년까지 에드워즈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은 총 2,551 편에 이르며, 그중 57.5%인 1,467 편이 최근 10 년(2011–2020)에 집중되어 발표되었다. 이는 에드워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의 확장 속에서도 분명한 한계가 드러난다. 같은 기간 선교학 분야에서 발표된 에드워즈 관련 논문은 단 37 편, 전체의 약 1.45%에 불과하다. 최근 10 년간 발표된 논문 역시 28 편에 그쳐, 그의 사상이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것에 비해 선교학적 반영은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방대한 연구의 축적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에드워즈는 특정 신학 전통에만 속한 인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온 보편적 사상가라는 점이다. 하버드의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그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에드워즈를 미국 지성사의 핵심 인물로 재조명하였다. 복음주의 전통 안에서도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파이퍼(John Piper) 등을 통해 그의 신학은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공백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선교학적 관점이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에드워즈 연구는 주로 신학, 철학, 부흥 운동, 설교학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의 선교사적 정체성과 사역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많은 연구가 그의 사상을 깊이 탐구했지만, 그의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선교적 실천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드워즈는 단순한 신학자나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7 년을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서 인디언 공동체와 함께하며 선교사로 살았다. 그는 그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복음을 삶으로 증언했다. 그의 신학은 강단 위에서만 선포된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살아낸 신앙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에드워즈를 설교자나 사상가로만 이해할 때, 그의 신학은 추상적인 체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로서의 삶을 함께 볼 때, 그의 신학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된 살아 있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드워즈 연구는 새로운 방향을 요구받는다. 이 흐름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낯선 문화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미 많은 신학적 지식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삶과 선교적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에드워즈 연구의 흐름은 분명 많은 것을 비추어 왔다. 그의 신학과 사상, 영성과 부흥에 대한 깊은 통찰은 오늘의 교회에도 귀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풍성한 연구 속에서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 놓쳐진 영역은 바로 선교적 시선이다. 에드워즈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복음을 들고 낯선 공동체 한가운데로 들어갔던 선교사였다. 그의 신학은 책 속에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을 넘어, 선교적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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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여주봉 칼럼 -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선교적 교회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은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의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모든 영역, 인간 사회와 역사의 모든 영역, 더 나아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1장 15~23에서 바울이 선포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이 구속은 우주적이다.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교도 이 구속의 폭만큼 넓어야 하며,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이 필요하다.이 거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바로 교회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창조세계를 구속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일을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로 이어졌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속을 나타내 보이시고 전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이뤄가시는 역사의 동역자다.그렇다면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doing)은 교회의 삶(being)에서 나온다.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데서 나온다. 마이클 고힌 박사가 말하듯이, "'선교적'이란 교회의 구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가 문화적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서술하는 것이다"('열방에 빛을', 42-43쪽).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을 성경은 '산 위의 도시'로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안 공동체다. 정의와 공의, 사랑과 긍휼, 화해와 평화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부터 의도하신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고,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모습이다.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모습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사회에 참여해도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의 실재를 보지 못한다.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이 교회의 삶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한낱 이론에 그치고 만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완다는 기독교 인구가 넘쳐났지만 그 믿음이 요청하는 정체성과 사명이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반면에, 초대교회는 작고 연약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주변 세계에 강력한 증거가 됐다. 그들의 삶이 곧 복음이었고, 그들의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듯이 초대교회는 가르침과 교제와 떡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며(행 2:42),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았고(행 2:44~45),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으며(행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7).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가 됐을 때, 그 존재 자체가 복음의 선포가 되었고,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증거가 된 것이다. 결국 교회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선교적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을 어떤 원리로 이뤄가는가?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태초부터 열방에 복이 되기 위해 복을 받은 존재였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임재를 매개하는 공동체다. 레위기 19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택은 윤리적 삶으로 나타나고, 그 윤리적 삶이 곧 선교적 증거가 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라고 하신 명령 뒤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규범들 즉 이웃 사랑, 약자 보호, 공정한 재판, 정직한 상거래 등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명기 4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5~6).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그 지혜와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 위의 도시'로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다.신약으로 넘어오면, 교회는 이 구약 백성의 정체성과 역할을 이어받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결정적 사건 이후에 새로운 특징을 갖게 된다.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선교적 백성이다. 교회는 입술의 선포뿐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드러낸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시작된 새 창조에 동참하는 새로운 인류로서, 옛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현한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정체성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며, 이 예배가 선교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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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3 김광근 - 주님의 발치에 부어드리는 향기로운 희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장 6절전 재산과 다름없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찌하여 허비하느냐"며 분노했지만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상 눈에는 무의미한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받으신 것입니다.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때때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 헛된 수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의 것을 드리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소중한 향유가 주님께 부어질 수 있도록 스스로 옥합을 깬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인 것입니다.성전을 밝히는 등잔의 기름이 늘 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열정도 멈추지 않고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의 발치에 쏟아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질 때 그 집에 향기가 가득했듯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을 깨뜨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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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곁에 머무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요즘 한국에서 뿐 아니라 미주 지역에서도 영화〈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을 바라보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가 건드린 지점은 화려한 권력 서사나 복수의 쾌감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빼앗긴 어린 왕과, 그를 곁에서 맞이한 한 사람이 서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 있다. 왕은 권좌에서 쭟겨 내려온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처음에는 계산과 현실 감각으로 움직이던 인물 또한, 점차 왕을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의 울림은 바로 여기에 있다.관객은 강한 왕보다 상실한 왕에게 더 깊이 마음을 내어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보다, 그 자리를 잃고 외로움과 상실감 속에 놓인 존재에게 자신을 겹쳐 본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이들의 내면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 가정에서 말할 자리를 잃은 사람, 공동체 안에서 역할은 남았지만 존재는 잊힌 사람들. 겉으로는 제 자리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유배를 경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곳에서조차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매일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다.그래서 이 영화 속 일상의 장면들이 특별한 힘을 가진다. 밥을 함께 먹는 장면, 사소한 말을 주고받는 장면, 서로의 표정을 읽어 가는 장면이 거대한 사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사람은 거창한 구호로 회복되지 않는다.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고, 누군가가 내 말을 들어 주고, 내 존재가 부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다시 살아난다. 존엄은 높은 지위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곁을 내어줄 때, 사람은 다시 사람답게 선다.이 지점에서 교회를 돌아보게 된다. 교회는 과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할과 기능으로만 이해하고 있는가. 직분은 있지만 대화는 없고, 모임은 많지만 마음을 들을 시간은 없고, 함께 예배하지만 서로의 외로움은 지나쳐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소통하는 교회는 말이 많은 교회가 아니다. 사람을 기능보다 존재로 먼저 보는 교회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 전에,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지를 살피는 교회다.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서 명령만 내리는 왕이 아니었다. 사람들 가운데로 오셨고, 함께 먹고 마셨고, 우는 자들 곁에 머무셨다. 하늘의 영광을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소통 역시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전달 체계여서는 안 된다. 곁으로 내려오는 동행이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설득의 기술보다 함께 있음의 태도일 것이다.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인정받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는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책임은 무겁고 마음은 고단하지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낼 자리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쉽게 침묵하고, 더 깊이 홀로 버틴다. 교회는 이런 침묵을 신앙의 미숙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무표정 속에 지친 마음이 있고, 누군가의 과묵함 속에 오래된 상실이 있다. 소통은 말을 잘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상대의 침묵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영화 〈왕과 사는 남자〉 신드롬은 결국 우리 시대의 결핍을 비춘다. 사람들은 권력을 갈망해서 이 영화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관계를 갈망했기 때문에 반응했다. 군림하는 존재보다 함께 살아 주는 존재를 더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마음을 열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존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진실하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이 영화의 바닥에 흐르고 있다.교회가 바로 그 갈망 앞에 서야 한다.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대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잘 말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 주는 사람이 귀한 곳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실패와 침묵 곁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소통하는 교회는 거창한 전략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한 사람의 곁을 지켜 주는 일에서 시작된다.영화 속에서 왕은 권좌를 잃은 뒤 사람을 만난다. 어쩌면 교회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사람을 볼 수 있다. 사람을 볼 때 비로소 소통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소통 속에서 공동체는 다시 살아난다. 진짜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를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사람답게 세워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왕과 사는 남자〉가 던진 울림은 바로 그 단순하고도 깊은 진실을 다시 붙들게 만든다.이것이 부활절을 앞둔 교회가 회복해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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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동식 칼럼 - AI 시대의 신앙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우리 시대는 제4의 물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농업을 지나 산업을 거쳐 정보화의 시대를 맞이했다가 이제 AI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섭게 세상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AI 자율주행 자동차 시대와 로봇의 시대는 이전의 물결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검색창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찾았던 시절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ChatGPT, 제미나이 등으로 명시되는 대화형 AI를 통해 지식을 알아갑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료를 순식간에 앉아서 보게됩니다. 고전 자료는 물론이고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록된 문서까지 보게됩니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더구나 검색 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로 각종 자료와 함께 나의 고민을 풀어줍니다. 그러니 공부가 무슨 필요가 있냐는 소리가 나올 지경입니다. 그러나 AI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AI의 답변은 접근 가능한 자료의 범위와 학습된 정보의 한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AI는 때때로 그럴듯한 문장으로 답을 구성하지만, 그 내용이 늘 검증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AI를 무서워할 필요도 없지만, 과신해서도 안 됩니다.현재 쓰고 책을 위해 심도있는 질문과 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긴 시간을 씨름하면서 서로가 원하는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전제가 다르니 접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반복해서 자기주장만 했습니다. 결국 결론에 가서 자료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이만하고 좀더 공부해서 다시 나누자고 했습니다. AI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학습을 하겠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자료 업데이트를 통해서 더욱 강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자료의 싸움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만의 소유한 자료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꼈습니다. AI 시대의 강자는 AI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스스로 검증할 수 있는 자기 자료와 분별의 기준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료 없이 AI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사실과 해석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 앞 뒤 구분도 못하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실체가 AI를 통하여 성큼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AI시대의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신앙이 단지 성경지식을 아는 것이라면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이 단지 나눔이라면 역시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는 것은 주님께서 두 세삼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기뻐하고 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AI 시대에 필요한 곳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무너진 사람의 심령을 세워지고, 하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교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은 지성,정서,의지와 창조성과 양심과 도덕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AI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이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줄 수 있습니다.  AI는 똑똑합니다. 탁월합니다. 수많은 정보를 잘 정리하는 능력을 사람이 따라가기에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정확하지 않습니다. AI는 존재하는 자료를 자기 학습해 지식을 넓혀갑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자료에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존재하는 것에서 답을 줍니다. 여기에 우리가 더욱 깊이 의존해야 할 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만남이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편히 쉬 수 있는 곳은 주님의 품입니다. 여기 저기 답이 있다고 말하는 시대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답이고, 유일한 위로임을 인식하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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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십자가의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기는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예기치 못한 인생의 시련이 찾아온다.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관계의 문제,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등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고난의 시간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일본의 전통 공예 기법 중에 ‘킨츠기’라는 것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 파편을 이어 붙인 뒤 갈라진 틈을 금이나 은으로 메워 복원하는 기술이다. 깨진 자국을 비슷한 색으로 덧칠해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눈에 띄는 금으로 그 틈을 굵게 채워 넣는다. 이렇게 복원된 도자기는 깨지기 전보다 강도가 높아질 뿐 아니라 아름다움까지 더해져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세상의 험한 풍파에 쉽게 금이 가고 부서진다. 세상은 깨어진 것을 실패라 부르며 쓸모없게 여기지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고난의 틈새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가장 값진 금을 채워 넣으시고, 우리를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빚어주신다. 이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신앙의 교훈이 있다.첫째, 우리의 깨어진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솔직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고난 받지 않은 척, 실패하지 않은 척 포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자신의 깨어짐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라고 말씀한다. 삶의 무게로 무너진 마음, 남모르게 흘리는 눈물, 해결하지 못한 삶의 문제들을 십자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쏟아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친히 품어주신다.둘째, 내 삶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통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원망하기 쉽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고난은 더 이상 흉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를 증명하는 거룩한 흔적이 된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라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응답하셨다. 킨츠기 도자기의 굵은 금빛 선처럼 내가 가장 약해져서 무너졌던 바로 그 자리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은혜의 자리가 됨을 믿어야 한다.셋째, 회복의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위로자가 돼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로 나의 깨어진 틈이 메워졌다면, 이제는 주변의 고난 받는 이웃들을 돌아봐야 한다. 예수님이 친히 찔림과 상함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고치셨듯, 내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통로가 된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 경제적 위기로 낙심한 자들에게 다가가 십자가의 사랑을 전할 때, 모든 교회가 상처 입은 영혼들이 살아나는 진정한 치유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고난은 결코 우리 삶의 끝이 아니다. 이번 고난주간이 은혜로운 회복의 시작이 되어서, 우리를 얽매는 모든 절망과 고난이 십자가의 은혜로 온전히 치유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고난이 찬송으로, 깨어짐이 거룩한 걸작품으로 변화되는 부활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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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2 김광근 - 깨어진 자아 위에 흐르는 은혜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시몬 베드로가 이르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 요한복음 13장 36절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살아있는 자아를 보셨고,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결단과 힘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믿지만, 철저히 자아가 깨어지지 않고는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결국 베드로는 처참하게 무너졌고, 새벽 닭이 울 때 그의 자아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주님이 이 수치스러운 과정을 허락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자신을 신뢰하는 법을 버려야만 비로소 주님의 은혜를 붙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깨어진 자아의 틈 사이로 더 깊은 은혜의 물줄기를 부어주십니다.은혜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연약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롭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는 과정을 통과할 때 우리는 진짜 은혜를 맛보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내 의지보다 "주님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으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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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전쟁 중에 올려 드리는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6.03.18
    1 오늘도 새날을 선물로 받아 기대와 희망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며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말씀을 하셔서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말씀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심을 사라를 통해 확인되는 순간 100프로 신뢰하며 감사를 토해 냅니다.3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다가 벼랑 끝에 가서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한시도 나를 멀리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때서야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 감사가 터지게 됩니다.4 세계가 전쟁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계시록과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묵상해 봅니다. 따라서 나라를 위한 기도제목도 다소 변경되어 갈 때마다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기도의 내용을 구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대부분 평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불편하고 괴로울 때도 있어 망설여집니다. 불편하면서도 강하게 밀려오는 메시지에 결국 굴복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하게 하실 때면 감사는 두배로 커집니다.6 신앙은 도박의 성격이 있다고 합니다. 미래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그 길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한 발자국을 뗄 때의 불안감. 이것으로 시작된 순종의 길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전에 없던 감사와 감격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감사를 드립니다.7 아브라함의 생애를 볼 때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할까 한 번도 믿어 보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 그 하나님이 떠나라고 한다고 어떻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8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제1계명으로 강조하십니다.아브라함을 우상의 세계에서 꺼내어 참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친히 보여 주셨으니 내게 숨어 있는 우상들을 모두 꺼내어 때려 부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9 예언서를 공부할 때마다 재림 찬양을 부르면서도 수시로 “내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가까이 원합니다”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찬송과 함께 신앙의 정조에 대한 말씀이 기억나 감사를 드립니다.10 "세상 풍조는 나날이 바뀌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라" 는 찬송을 부르며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날마다 변해오는 세상의 풍습에 젖지 않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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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주성철 컬럼 - 인생의 새벽을 깨워라 크리스천헤럴드2026.02.20
    지난해 말 아내와 함께 덴버를 다녀왔습니다. 먼저 섬기던 교회에 저의 후임으로 온 목사가 은퇴를 한다고 해서 우리 내외를 초청했습니다. 년말도 되고 해서 우리는 자동차로 라스베가스의 처형 댁에서 하룻밤 쉬고 덴버로 갔습니다. 오랫만에 편도1,100여 마일 되는 거리를 운전하여 갔습니다. 오랫만에 보고싶은 사람들도 보고, 예전에 덴버지역에서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1997년에 덴버에 갔을 때, 덴버지역에 세대 교체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령에 목사님들이 모두 은퇴하고 젊은 사역자들로 교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덴버를 다녀오면서 나름대로 2026년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2026년에 해야 할 일들을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목표를 세우고 심지어 표어까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깨우는 일에 부족한 종을 사용하시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새벽을 깨워라”인데, 영어로도 걸맞는 표어를 생각해 냈습니다. “Awakening the Dawn of Your Life”란 말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이 문구를 생각하면서 나의 삶과 사역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먼저 제 자신의 인생에서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는 것과, 사역으로 주위에 안일한 생각과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잠자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하여 그들을 깨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가운데 마치 개구리가 미지근한 물 속에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즐기는 기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위 환경을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나 안일한 생각과 삶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들을 방문해 봐도 하나님의 말씀이나 기도, 또는 영적인일 보다는 친교가 강조되고, 모이면 먹고 마시는 일에만 치중하다보니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도 모르는체 그저 한주 한주 지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후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알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으며, 정부는 정부대로 현재 노인들에게 좋은 혜택을 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후세대가 그 모든 빚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은 알지 못한채  정부에서 주는 돈을 받고 마냥 즐거워만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같은 상황입니다. 노인들 가운데 정부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자산을 자녀들의 명의로 옮기고 정부에서 주는 혜택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오랜지 카운티 어느 한 노인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주차장에 주차해 있는 자동차들이 거의 모두가 고급 승용차였습니다.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는 노인들이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을까! 물론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정부에서 웰페어를 받고 계신분들이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큰 괴로움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살면서 크리스찬들이 성소수자나 진보주의과 인본주의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마음이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주는 권리를 찾지못하고 그 권리를 잃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엄연히 미국 헌법으로 우리의 권리를 세울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타협하고, 정치 기후로 타협하고, 재정적으로 타협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진리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무디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깨워야 하겠다는 마음이 새해를 맞으면서 마음에 큰 도전으로 왔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라 하시는 충동이 일고 있습니다. 죄악이 범람한 이 세대 속에서 말씀 그대로 이 세상을 본 받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타협하며, 적절한 이유를 대며 믿음을 타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한 말씀이 마치 나의 뒤통수를 방망이로 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새벽을 깨운다”라고 했을 때 영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영적인 것은 물론이고, 우리 커뮤니티 속에서, 가정속에서, 학교나 직장에서 인생에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영혼들을 깨워야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영적으로는 물론이고,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바른 말 하기를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역류해 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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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2.19
    한국에서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 열풍이 뜨겁다. 두쫀쿠 한 입이 혈당을 확 끌어올릴 만큼 달고 진한데도 사람들은 그 자극을 위로처럼 찾아다닌다. 한 입 베어 물면 쫀득하고 바삭한 식감이 동시에 터지고, 사진과 영상으로 옮기기 좋은 비주얼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운맛 열풍이 있었다. 혀가 얼얼해질수록 “오늘도 버텼다”는 기분을 나누는 문화가 생겼고, 누군가는 그 매운맛을 스트레스의 배출구로 삼았다. 맛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흐름은 같은 곳을 향한다. 자극은 언제나 마음의 빈자리를 건드린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의 마음은 꽤 허기지다.요즘의 음식 트렌드는 단순히 “뭐가 맛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먹는 행위가 감정을 번역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불안하다, 답답하다, 미래가 막막하다는 말을 길게 풀어내기엔 우리는 너무 지치고, 사회는 여전히 감정을 설명하는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감정은 맛으로 우회한다. 매운맛은 말로 못 내뱉는 분노와 압박을 대신 내뱉게 하고, 달콤하고 과장된 식감은 지친 마음을 잠깐이라도 달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자극적인 음식은 감정의 스위치를 잠시 바꿔주는 손쉬운 장치가 된다.또 하나의 배경은 관계의 변화이다. 1인 가구가 늘고 혼밥이 일상이 되면서, 식탁은 더 이상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예전에는 밥상머리가 하루의 온도를 나누는 자리였다. 국을 떠주고, 얼굴을 보고, 말이 막히면 침묵도 함께 견디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의 식탁이 비면 화면이 그 자리를 채운다. 먹방과 소셜미디어 속 트렌드 음식은 심리적 허기를 잠깐 달래준다. 누군가와 같이 먹는 느낌을 흉내 내고, 유행에 참여했다는 소속감을 준다. 그러나 화면 속 공동체는 따뜻해 보여도 나를 알아주지는 못한다.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내 눈빛을 읽지 못하고, “괜찮냐”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아 주지 못한다.그래서 매운맛 열풍에서 나타난 ‘고통의 연대’가 이해된다. 취업난과 경쟁,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청년들은 매운 음식을 통해 현실 감정을 공유하고 해소한다. “나도 힘들다”를 직접 말하기 어려우니 “나 이 정도 매운 것도 먹는다”로 돌려 말한다. 함께 맵부심을 나누며 서로를 확인한다. 연대이긴 하다. 하지만 슬픈 연대이기도 하다. 고통을 나누는 연대는 있는데, 삶을 함께 건너는 연대가 부족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자극을 함께 소비하는 것으로는 내일을 살려낼 손이 되기 어렵다.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거창하지 않다. 교회는 다시 식탁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말씀과 기도만이 아니라 함께 떡을 떼며 삶을 나눴다. 식탁은 친교 프로그램이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를 몸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오늘의 교회는 자리는 많지만 식탁이 적다. 자리는 앉는 곳이고 식탁은 마음을 내려놓는 곳이다. 행사로 모으는 것보다 작은 밥상을 반복해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예배 후 인사로 끝내기보다 “요즘 잠은 자냐”는 질문이 필요하다. 정답을 건네기 전에 사연을 끝까지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교회는 트렌드를 비웃지 말아야 한다. 두쫀쿠나 매운맛을 “요즘 애들 유난”으로 치부하는 순간, 교회는 시대가 보내는 신호를 놓친다. 트렌드는 욕망의 포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핍의 언어이기도 하다. “자극이 없으면 못 버틴다”는 말은 삶의 통증이 크다는 뜻이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관계가 피곤할 만큼 상처가 많다는 뜻이다.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뜻이다. 교회는 이 신호를 복음의 언어로 번역해 줘야 한다. 판단이 아니라 해석으로, 훈계가 아니라 동행으로 응답해야 한다.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연대를 소망의 연대로 바꾸는 일이다. 매운맛이 잠깐의 엔도르핀을 줄 수는 있다. 달콤한 디저트가 한숨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잠깐의 자극이 아니라 지속되는 관계이다. “누구나 다 힘들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은 내가 네 편이 되어주겠다”로 이어지는 연대가 필요하다. 그 연대는 대형 프로그램이 아니라 습관에서 시작된다. 한 주에 한 번 함께 밥을 먹는 습관, 지나가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습관, 결석을 영적 나태로 단정하지 않고 삶의 파손으로 읽는 습관이 필요하다.소통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허기진 마음을 함께 먹는 일이다. 교회가 다시 식탁을 회복할 때, 화면이 대신하던 위로를 사람의 얼굴이 건네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소통하는 교회’는 유행을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라, 시대의 외로움에 대답하는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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