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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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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도파민의 시대, 다시 골방의 영성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바로 '도파밍'(Dofarming)과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이다. 여기서 '도파밍'이란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Dopamine)과 수집한다는 뜻의 '파밍'(Farming)을 합성한 신조어로, 현대인들이 짧고 자극적인 재미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디지털 홍수 가운데 역설적으로 각종 전자기기 사용을 중단하고, 명상, 독서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려는 디지털 디톡스의 움직임 또한 커지고 있다. 일정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꺼낼 수 없게 하는 이른 바 '스마트폰 감옥'이라는 상품까지 등장해 큰 화제를 모았다.이러한 사회 현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사로잡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면의 쉼과 회복을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현상을 넘어 자극에 지친 영혼이 평안과 안식을 원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참된 평안과 안식은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다.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등장한다. 바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이세벨의 살해 위협 앞에 이내 탈진해 광야로 도망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광야에서 먹이시고 40일 길을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하셨다.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던 하나님은 그 후에 오직 세미한 소리 가운데 그를 만나주셨다(왕상 19:12).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엘리야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 오늘날 우리도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집중하는 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세상의 디톡스가 잠시 마음을 비우는 명상에 머문다면, 그리스도인의 디톡스는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과 독대하는 나만의 골방을 마련하는 것이다. 매일 30분이라도 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내고, 비워진 그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지친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엘리야를 회복시킨 것은 갈멜산의 불덩이가 아니라 호렙산의 세미한 음성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세상의 소리에 무뎌진 우리의 영적 감각을 말씀과 기도로 다시 조율하고, 성령의 위로하심을 온전히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안과 새 힘을 얻게 된다.여기서 더 나아가, 골방의 영성으로 내면을 회복하고 새 힘을 얻은 성도는 이제 그 은혜를 삶의 실천으로 이어가야 한다. 참된 은혜는 우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정의 달인 5월은 사랑 실천에 있어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나의 유익과 만족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내게 허락하신 가족과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돌려야 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눈을 직접 맞추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향해 가고 있다. 올해 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세웠던 결심이 일상의 분주함과 세상의 자극 속에서 어느새 무뎌졌을지 모른다. 이제 하나님과 독대하는 나만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거룩한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올 것이다. 이처럼 고요한 골방에서 얻은 새 힘으로 유혹 많은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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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무너지는 시대, 가정을 지켜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매년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이며, 그 중심에는 부부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그 다음 중요한 관계가 부부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부부 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가정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혼율 증가, 저출산 문제, 혼인 기피, 독신주의 확산, 고독사 증가, 청소년 정서 불안, 세대 갈등까지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가정의 약화와 연결돼 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휴대폰 화면은 바라보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의 마음은 놓치고 살아가는 시대가 됐다.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랑 안에 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멀어지자 부부 사이도 멀어졌다. 부부 문제의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부 관계가 힘들어질수록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세상에 완전한 부부는 없다. 모두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부부는 상대를 바꾸려 하고 비난하려 한다. "당신은 왜 그러냐"는 말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더 메말라 간다. 반면 건강한 부부는 상대의 허물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본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한다. "주님, 먼저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그런 부부를 조금씩 아름답게 빚어 가신다.통계청 자료를 보면 혼인 건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결혼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경제적 부담과 가치관의 변화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깊은 곳에는 사랑과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면 사회도 건강하고,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도 흔들린다.특별히 오늘 시대는 관계를 쉽게 끊어 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단하고, 힘들면 떠나고, 상처받기 전에 관계를 포기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끝까지 품고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부부는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부부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말이다. 대부분의 갈등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말은 마음을 살리지만, 거친 말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특히 분노와 자극적인 언어에 익숙해진 시대 속에서 가정의 언어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엡4:29)고 말씀한다.에베소서 5장은 부부 관계의 모델을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찾는다. 아내에게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남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억압과 지배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 주는 관계를 의미한다.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세워야 한다. 남자는 인정받을 때 힘을 얻는다. 작은 칭찬 한마디가 남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으면 안 된다.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가정을 따뜻하게 만든다.성경은 부부를 한 몸이라고 말씀한다. 한 몸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는 관계다. 서로의 약점을 들추기보다 덮어 주고, 정죄하기보다 품어 줄 때 가정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게 된다. 행복한 가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존중하는 말, 사랑의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믿음 위에 세워진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 가정을 붙드신다.지금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가정의 회복이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사회가 살아난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는 일은 단지 한 집안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지키는 일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에덴동산처럼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원하신다. 오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꼭 사랑을 표현해 보자.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하나님 안에서 부부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의 가정마다 사랑과 기쁨이 다시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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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한 사람의 일기가 세계 선교를 움직이다 브레이너드가 남…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선교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많은 사람은 대규모 집회와 뜨거운 부흥의 현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교를 시작하신다. 한 사람의 눈물, 한 사람의 기도,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선교신학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젊은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이다. 그의 삶은 짧았고, 그의 사역은 외형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는 이후 세계 선교의 흐름을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브레이너드는 29 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건강이 약했고,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며 사역했다. 그가 섬겼던 곳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미국 북동부의 인디언 부족 공동체였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고, 문화는 낯설었으며, 환경은 혹독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성공보다 실패, 열매보다 고독이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일기는 특별하다. 그것이 사역의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의 글에는 화려한 표현이 없다. 대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눈물의 기도가 담겨 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기를 원한다." "나는 더 거룩해지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씨름한 흔적이었다.  브레이너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에드워즈의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즈는 그 곁을 지키며 이 젊은 선교사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가 남긴 일기와 기록들을 정리하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The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1749)로 출판하였다. 이 한 권의 책이 끼친 영향은 놀라웠다. 현대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이 책을 읽고 인도 선교를 결심했다.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이 책을 통해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짐 엘리엇(Jim Elliot)은 브레이너드의 삶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한 사람의 짧은 생애와 그가 남긴 일기는 수백 명의 선교사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선교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결과와 규모로 사역을 평가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 얼마나 큰 열매가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삶은 다른 기준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깊은 헌신을 통해,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를 움직이신다. 특히 주목할 점은, 브레이너드의 영향력이 그의 생전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에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기록은 이후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하나님은 그의 삶을 즉각적인 성공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향력으로 사용하셨다. 에드워즈 역시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단순한 개인 기록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영적 유산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 글을 정리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은 단순한 편집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의 불씨를 이어가는 신학적 행위였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기도의 능력이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다음 세대에 증언하고자 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도 깊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때로 작은 교회, 제한된 환경,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사역한다. 우리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작은 삶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신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본질적으로 경계선 위의 삶이다. 우리는 미국 사회 안에 살지만 완전히 중심에 속해 있지 않고, 한국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이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때로 약점처럼 보인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삶은 그 소외감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화려하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낸 삶이, 오히려 더 멀리, 더 깊이 흘러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교는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종, 한 사람의 눈물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그것은 한 시대를 움직이는 도구가 된다. 브레이너드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누군가에게 이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작을 수 있다.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삶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신다. 그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더 깊이 흘러갈 수 있다. 선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선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낸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삶이 기록되고, 전해지고,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일기는 세계 선교를 움직이는 불씨가 된다.  한 사람의 기도는 결코 그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헌신은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오늘 미국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살아가야 할 방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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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5 김광근 - 내 생각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장 5-6절우리는 매 순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내 경험. 내 계산. 내 판단이 삶의 나침반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구요. 이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더 앞세우는 삶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어부인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그 한 마디의 순종이 기적의 문을 열었습니다하나님의 역사는 내 경험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재정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그것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리심이 아니고 지연이 실패가 아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신뢰입니다당신은 지금 마음속에 꽉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고집. 내 계산. 내 두려움!. 그것을 오늘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내 길보다 주님의 길이 늘 옳습니다.' 그 고백 위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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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0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숨을 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며칠 전 한 장면이 오래 남았다. 많은 인기를 누리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의 고백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행복해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숨이 안 쉬어졌다”고 말한다. 버티고, 견디고,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 더 이상 숨이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최근 한국 TV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남매가수 악뮤(악동뮤지션)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생 이수현은 긴 슬럼프 속에서 무대 위조차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오빠 이찬혁은 그 시간을 버티게 한 방식이 ‘해결’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보여준다. 핵심은 단순하다. 사람은 정답으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숨 쉴 수 있는 관계가 있어야 다시 살아난다.그러면 교회에 적용해 볼 때, 교회는 숨 쉬는 공간인가?이 질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교회는 과연 숨 쉴 수 있는 곳인가.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사람들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감춘다. 힘들다는 말 대신 괜찮다고 답하고, 무너졌다는 고백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이유는 명확하다. 말해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칼럼에서 강조했지만, 교회는 종종 너무 빨리 답을 내린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으면 공감보다 해석이 먼저 나온다. 기도해라, 믿음으로 이겨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 분명히 이 말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 숨이 막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공기다. 공감 없는 진리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더 깊은 침묵으로 밀어 넣는다.악뮤의 또 다른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이제는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매일 대화하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관계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멀어진다.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고 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인다. 듣지 않으면 관계는 끊어진다. 결국 사람은 떠난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근본적인 착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함께 있음’이 ‘연결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들 남매가 방송에 나온 이유 중 하나는 “한 줄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는 욕구다.여기서 교회는 질문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있는가. 대부분의 공동체는 결과만 공유한다. 회복된 이야기, 정리된 간증, 완성된 결론만 남는다. 그것도 대부분의 결과는 성공과 축복의 내용 뿐이다. 그러나 실제 삶은 진행 중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여전히 흔들리는 믿음, 끝나지 않은 고통이 더 많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교회 안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교회 밖에서 풀어낸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더 형식적인 공간이 된다.소통은 단순한 대화 기술이 아니라 삶을 함께 짊어지는 태도라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의 내면 깊은 허기를 함께 나누지 못할 때, 공동체는 표면적인 연결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함께 있음’이 아니라 ‘혼자 버티는 구조’다.소통하는 교회는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교회다. 차이는 분명하다.첫째, 공감이 먼저다. 가르치기 전에 듣고,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둘째, 약함이 허용된다. 흔들림을 드러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입을 연다.셋째, 의도적인 대화가 있다. 관계는 노력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반복적인 질문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넷째, 과정이 공유된다. 완성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진행 중인 삶을 나눌 때 공동체는 현실과 연결된다.이 네 가지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결국 결론은 하나다. 교회는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곳,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꺼낼 수 있는 곳, 정답이 없어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곳.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는 ‘버티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사람은 버티는 곳을 떠난다.그러므로 소통은 선택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이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요즘, 정말 괜찮으세요” 이 질문을 진심으로 던지고 끝까지 듣는 것. 그 순간, 누군가는 다시 숨을 쉰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교회는 다시 교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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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주성철 컬럼 - 말세지말에 사는 우리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우리가 모두 다 잘 알다시피 호르무즈 해협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동안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과 기타 화물선의 통과를 제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미군 함정이 그곳을 지키므로 수뢰를 걷어내고 있다. 이란은 더 이상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지하 도시를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하게 지어놓고, 이란 혁명수비대를 모두 생매장했다. 이란의 커다란 실수는 지하 도시에 들어가는 입구를 마련해 놓았지만, 미국이 B2 폭격기로 입구를 공격해서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전자 장비를 비롯해 이란군 총 지휘본부, 레이더 및 기타 전산 모두가 파괴되어 지상과 연락이 끊겨 버렸습니다. 산소도 부족한 가운데 죽을 날 만 기다리는 사람이 수천이나 된다고 한다. 이란 현 정부는 미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고 협상해서 그동안 묶여있던 자금을 풀어준다는 조건으로 협상했다고는 하지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무근인 이야기라고 하며 대립하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우선 북한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국력을 비교해 봐도 인구수를 생각해 봐도 핵만 빼놓고는 이란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세계는 판단하고 있다. 이란은 그저 지하 20미터나 30미터만 생각했지, 미국이 입구를 파괴하여 모두 매장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북한도 이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지하 도시를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미국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이란의 경우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지하 도시의 조감도를 비롯해서 무기 창고, 탱크 저장소, 등등을 인공위성을 통해서 시간, 분, 초 단계로 그들의 행동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그 지하 도시에 모두 들어가기 까지 기다렸다가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은 손바닥 보듯이 모두 파악하고 있다. 북한이 지하도시 구조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도록 만들어 놨지만, 미국은 이 모든 것을 인공위성과 CIA 정보로 세심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불안한 것은 미국은 대한민국의 좌파 정부와 기밀을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고, 지난 2026년 4월 초 (6일부터 8일 사이), 신형 무기 체계들을 시험하며 “집속탄(Cluster Bomb)”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실험한 바 있는데, 대한민국을 모르고 있고 이 일에 대하여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직접 북한에 직접 경고했다.또한 최근에 그런데 최근에 북한이 개성 단지를 군기지로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이 50킬로미터 안으로 들어와 북한의 제일 초소라고 전했다. 최전방 화력 기지로 완전히 탈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준 건물, 아스팔트 길 등등으로 그들이 탱크와 무기를 가지고 진격할 것이란 보도이다. 이제 북한도 마치 다니엘서에 벨사살 왕처럼 저울에 달린 격이 되어 버렸다. 아모스서 1장과 2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는 물론이고 그 주위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심판이 설명돼 있다. 제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나라들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는 나라는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어찌 사람을 철 타작기로 타작하였는가! 생명의 존엄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이런 일을 자행하는 패역한 나라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는 않으신다. 이제 우리는 종말을 살고 있고, 그때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임박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이 마지막 때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을 안 해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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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인생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눌려 있다. 해야 할 일보다 마음의 짐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경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상처, 이미 끝난 관계, 내려오지 않는 자존심, 더 가지려는 욕심, 잃어버릴까 두려운 미래, 내 뜻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 손에 꼭 쥐고 있을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삶은 점점 지쳐 간다.신앙은 더 많이 붙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이 맡기는 믿음이다. 세상은 붙잡아야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맡길 때 비로소 참된 평안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붙드는 손을 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고향과 익숙한 삶을 내려놓았다. 더 나아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까지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줌의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뿐이었다. 그것은 오늘을 버티게 할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녀는 그것마저 내려놓았다.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는 떡을 먼저 엘리야에게 드렸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됐다.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으로 내려놓는 자의 빈손을 은혜로 채우신다.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익숙했던 배와 그물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의 포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와 생계, 익숙함과 안전함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그 순간 평범한 어부는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됐으며,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 바울 역시 내려놓음의 사람이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가문, 최고의 학문, 종교적 열심, 사회적 명예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하나님은 바울을 복음의 가장 위대한 통로로 사용하셨다.왜 우리는 내려놓지 못할까. 대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내려놓으면 잃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존심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셋째는 욕심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은 역설이다. 붙잡으면 오히려 무거워지고, 맡기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 자기 방식, 자기 뜻, 자기 기준을 절대화하는 삶을 멈추는 것이다. 신앙은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추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 길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의 가장 깊은 자리다. 자기 뜻을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시작된다.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욕심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 더 소유하고 싶은 욕심, 더 성공하고 싶은 욕심은 결국 우리 영혼을 무겁게 만든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이 죽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심이 죽을 때 비로소 믿음이 살아난다.마지막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인생의 주인 자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삶의 결정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일 때는 모든 것이 짐이 된다. 미래도, 관계도, 사역도, 가정도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주권을 맡기는 순간 마음은 달라진다. 두려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고, 무거움 대신 자유가 시작된다.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 전에 내려놓음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고, 마침내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고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됐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내려놓음 위에서 시작됐다. 오늘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붙잡고, 걱정을 붙잡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자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붙잡으면 짐이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기적이 된다. 붙드는 손을 펴는 순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 내려놓을 때 은혜가 시작되고, 내려놓을 때 능력이 나타나고, 내려놓을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손을 편다. 자존심과 욕심·상처·두려움을 내려놓고, 인생의 주인 자리까지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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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4 김광근 - 아침에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시편 5편 3절하루는 무엇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 로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정보와 격정 속으로 들어가지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이 고백은 단순한 경건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표현이며 아침에 하나님을 찾는다는것은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남는 시간에 찾는 분이 아니라,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분입니다. 또한 다윗은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막연한 독백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의 행위입니다. 이확신이 없으면 기도는 쉽게 형식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들으신다는 믿음은 우리의 기도를 지속하게 만듭니다.그리고 그는 "바라리이다"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기도가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과 일하심을 기대하며 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결국 핵심은 시선입니다. 문제를 먼저 보면 두려움이 커지고, 자신을 보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은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아침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방향입니다. 오늘도 이 고백으로 하루를 열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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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변함없은 은혜를 기대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첫 시간에 변함없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입니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사가 나옵니다.3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늘도 가까운 식구들을 서로 사랑하는 일을 우선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4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털어놓는 기막힌 사모님의 사연을 듣는 중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시니 더 간절히 중보기도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5 부활 후에 주고 가신 선물들을 매 순간 성경 속에서 찾아내다 보니 한없이 나옵니다.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놓게 하시더니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들이 날개를 펴고 날듯이 창공을 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6 사모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속에 감춰진 가능성과 은사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경청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7 오랜동안 사역해 오다 보니 순수성을 잃어가고 나의 경험과 터득된 지식들이 앞장서서 사랑에 수많은 잡티들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십자가 앞에 나아가 처음 사랑의 순수성을 다시 찾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8 우리는 사랑한다 해도 조건을 붙일 때가 많습니다. 옳고 그름이 앞서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하는 사랑이므로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이 사랑이 닿는 곳이라면 생명이 살아나게 되어 있으니 이 사랑을 다시 하기로 재 다짐하며 감사합니다.9 이번 달 실천 사항은 1) 다시 복음으로, 2) 다시 처음 사랑으로, 3) 다시 내 자리로 입니다 "다시"라는 희망언어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다시”가 없었다면? 내 생애 속에서도 “다시”가 없다면? 십자가에서 “다시”부활이 없다면? 을 묵상할 때마다 새로운 비전이 밀려와 “다시”감사를 드립니다.10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체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 탄력성을 주셔서 사모들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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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척하는 인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Netflix에서 흥행했던 요리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 시즌2 가 성황리에 끝났다. 결승에서 우승한 최강록 셰프는 마지막 대회의 과제인, ‘나를 위한 요리’ 를 만드는 경합에서 그가 선택한 요리에 대한 이유와 고백이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했다. 대회 내내 자신의 무기처럼 사용한 조림기술. 모두가 또 한 번 이 비장의 기술로 최고의 조림요리를 만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다른 요리를 선택했다. 이유는 뜻밖에도 자신이 조림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잘 하는 척을 할 뿐이라고 했다. 본인을 위해 하는 요리는 진심이어야 하는데, 스스로에게 잘하는 척하는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척하면서 살 때가 많은데, 이 순간만은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인정한다 해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요리를 마치 가장 잘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잘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자. 이 순간만큼은 척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뜻이었다. 이 말은 들은 많은 경연대회 참가자들이 공감했다. 심사위원인 미쉴렝 쓰리스타 안성재 셰프도 최강록 셰프의 말에 공감하며 자신도 잘하는 척을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 척하면서 산다. 그래야 주위에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잘하는 사람으로 소개해야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우리의 이력서를 보아도 그렇고,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바쁜 사람인 것처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래서 척하며 산다는 말이 공감이 간다. 우리모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의미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보여주며 살기 어렵다. 부족한 내 모습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안 된다. 심지어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허물을 보이기 싫어한다. 그래서 잘난 척, 아는 척, 괜찮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산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척하며 산다. 그렇게 우리모두 자신을 포장하며 산다. 어쩌면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척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그것을 다 공개하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서로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안에서도 우리의 허물을 다 공개하면서 살기 어렵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있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고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척할 필요가 없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만은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그 어떤 포장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유일하게 척할 필요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분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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