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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돌아갈 집이 되어주는 것이다

작성일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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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가 전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거대한 바다나 괴물보다 한 단어가 오래 남았다. ‘집’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이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승자의 화려한 귀환이 아니다. 그는 바다에서 길을 잃고, 동료를 잃고, 때로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이 이야기를 쓴 것은 거의 3천 년 전이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 역시 조금씩 오디세우스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이 연결돼 있다. 손바닥만 한 전화기 안에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교회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참 묘하다. 이렇게 많이 연결돼 있는데도 외롭다. “요즘 어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말 내 이야기를 꺼내 놓을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정보는 넘치는데 대화는 줄었다. 말하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오래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교회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교회로 “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렵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 인생이 엉켜버린 사람, 실패를 경험한 사람,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 사람 곁에 앉아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완벽한 장소가 아니다. 그곳에도 갈등이 있고, 기다림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그래도 그는 이타카로 돌아간다. 그곳에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 페넬로페가 있고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다. 결국 집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 15장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집을 떠났던 아들이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탕자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돌아온 아들만큼이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그를 알아본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리지 않는다. 먼저 달려간다. 나는 이 장면이 복음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먼저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실패 보고서를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니”라고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먼저 끌어안는다. 설명보다 관계가 앞선다.


놀란 감독은 인터뷰에서 <오디세이>를 이야기하며 상호 존중이 어느 정도 문명을 규정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문명은 거대한 제도나 화려한 건축물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웅장한 예배당이나 좋은 프로그램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다.


우리는 소통을 자꾸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더 세련된 영상을 준비하고, 더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쓴다. 물론 그런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소통의 시작은 말하기보다 듣는 데 있지 않을까.


누군가 “힘들어요”라고 말했을 때 곧바로 성경 구절을 찾아주기 전에 그 힘듦이 어떤 모양인지 물어보는 것. 청년이 교회를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믿음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기 전에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들어보는 것. 노년의 성도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고 말할 때 시대에 뒤처졌다고 넘겨버리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어쩌면 이것이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소통인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에는 폭풍이 있고 유혹이 있고 잘못된 선택도 있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 길을 잃는다.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어떤 사람은 관계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욕망에 끌려 생각보다 먼 바다까지 떠밀려간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질하는 등대가 아니다. 돌아갈 방향을 비춰주는 등대다.


나는 교회가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잘한 사람만 오는 곳이 아니라 지친 사람이 돌아오는 곳. 정답을 가진 사람만 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질문을 품은 사람도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곳. 한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왜 이제 왔어요?”보다 “잘 왔어요”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이미 우리를 평가하는 곳이 너무 많다. 직장은 성과를 묻고, 마켓은 능력을 묻는다. 온라인 세상은 쉴 새 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게 만든다. 교회마저 사람의 자격을 묻기 시작한다면, 길을 잃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오디세이>는 아주 오래된 귀향 이야기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바다를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늘도 자기만의 이타카를 찾고 있다.


그때 교회가 멀리서 그 사람을 알아보고 먼저 달려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설명보다 포옹을 먼저 건네고, 판단보다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은 더 크게 말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다시 돌아갈 집이 되어주는 것.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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