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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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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상처를 통한 공감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대한민국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문학이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노벨상 위원회의 평가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깊은 고통과 상처, 죄의식, 그리고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구원의 희망은 독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작품들을 읽고, 작품의 평가를 읽으면서 이런 궁금함이 생겼다. 그렇다면 교회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한강의 문학 속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은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자신의 상처에 갇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며,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해결할 방법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상처를 인정하고,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슬픔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교회가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상처에도 주목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한강의 작품처럼, 인간의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파악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또한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는 고통을 나누고 함께 짊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한강의 문학이 고통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그려내듯이, 교회도 그들에게 빛을 비추고 희망을 전달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단순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복잡하고 얽혀 있다. 단순한 구호나 도덕적 교훈으로는 그들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고통 속에서 그들과 함께 머무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교회는 단순한 답변을 제시하기보다는 한강의 문학처럼 깊은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또한 한강의 문학 속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구원의 가능성'이다. 그의 작품은 때때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미한 구원의 빛을 암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인물들은 그 빛을 찾지 못한다. 교회는 바로 이 점에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교회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단순히 기적처럼 쉽게 풀린다는 단순한 낙관론이 될 수 없다. 한강의 문학이 그렇듯이, 교회의 메시지도 고통과 상처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교회는 또한 한강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문학 속 인물들은 종종 인간 존재의 의미, 고통의 이유,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는다. 교회는 이 질문들에 대해 가볍게 답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질문들을 함께 나누고, 신앙 속에서 어떻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한강의 문학 속에서 반영되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의 진정한 소통이다. 그들이 느끼는 상처와 고통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한강의 문학이 그러하듯, 교회도 그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많이 아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도 많이 아프다.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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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0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4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2 – 알렌>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선교사는 대부분 낯선 땅에 도착하여 이중문화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을 경험한다. 히버트는 이중문화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유발한다고 주장하고, 존 폴 레더락(John Paul Lederach)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정상 범위에서 지나치면 탈진이 된다. 선교사가 타 문화로 들어가 갈등을 겪는 것은 탈진의 요소다.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 일컫는다.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 한 의료선교사역자로서 26세 때, 1884년 9월 14일 조선에 도착하여 21년 동안 사역했다. 그는 미국 공사관 공의 자격으로 입국하여 제중원을 설립하고 주로 의료와 학교, 외교사역을 하였으며,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는 통로역할을 했다.그가 고종의 큰 환대를 얻은 것은 갑신정변 때 조선의 권력자요, 보수파 민영익을 극적으로 치료한 사건이다. 민영익은 온 몸에 심한 자상과 여러 군데 동맥이 끊겼고, 머리 외 일곱 군데를 칼로 찔려 피투성이었다. 목숨이 위태롭건만, 당시 한의사들은 검은 송진으로 상처에 바르고 있었다. 이 때 알렌이 등장하여 외과 수술을 했다. 만약 수술 도중 실패했다면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하고, 기독교를 전하지도 못한 채 칼로 사람을 죽인 것이 되어 그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그는 죽음의 위기와 조선의 복음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침내 생명을 구하였다. 민영익의 후원과 고종의 시혜로 광혜원을 설립했다. 기독교가 금기 되던 때에 불안정하게 입국한 모든 선교사들을 그곳에서 사역하도록 동원하여 보호하였다. 그러나 증원하는 환자와 관리사들로 인해 병원의 예산이 부족하여 힘들었다. 또한 한국의 전통치료법은 종기에 암소 배설물을 바르고, 정신착란에 구더기를 사용하는 등 경악할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폄하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청국과 일본의 수백명의 군인을 치료하고, 하루에도 수백명의 사람들을 진료하느라 온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된 날을 보냈다. 의약품 구입은 어려웠고,  키니네(학질특효약)를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약이 없을 때는 논두렁의 흙을 상처에 발랐더니 묘약처럼 효과를 내어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박사라 불리우며, 희생적으로 봉사했다.그는 고종의 신임으로 왕실의 의사와 정치 고문이 되어 모든 내외국 고위인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역할과 공적들을 기록화 했다. 고종에게 종2품의 ‘가선대부’로 벼슬까지 받았지만, 동료 선교사들의 핀잔과 갈등, 독설과 불신으로 힘들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 따른 마찰이었다. 알렌은 당시 선교사들이 조선의 법을 어기고 마구잡이로 전도하는 위험에 독단적이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했고, 비일비재하게 위험이 노출될 때마다 도와주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알렌이 선교하러 와서 병원 같은 것이나 세웠다고 맹비난하며, 정치와 종교가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렌에게 파쟁과 갈등은 고통이었다.알렌의 탈진을 세가지로 간단히 요약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수백명의 환자를 치료하느라 사역의 과부하였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그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죽음을 감수하는 위기를 겪었다. 선교사들 간의 갈등은 불안과 고립을 의미했다. 고종이 미국에 한국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했을 때 다른 선교들에게서 쫓겨가는 듯한 자괴감도 느꼈을 것이다. 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벼룩과 모기, 더위와 추위, 불결한 위생, 이방나라에서 긴장, 한국전통치료법의 난해, 국가 정세의 불안정, 낙후한 문화 상태 등은 스트레스를 넘어 선 탈진 요소다.그는 일관된 헌신을 보여주므로, 의료, 교육, 외교, 문화적 근대화의 문을 열도록 공헌한 점은 기념할 만 하다. 때로는 과묵함으로 인내하고, 성실하게 사역하며, 한국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도록 노력한 일관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지한 동정심과 친절한 감정’이었다. 믿음의 열정적인 사역과 갈등의 스트레스를 중립하려는 노력은 회복방법이었다.특히 이중문화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따른 마찰은 알렌에게 큰 과제였다. 박선기박사는 레더락의 갈등 전환의 변화로 그 자체를 초월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품어주며,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며, 화해의 영성을 추구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반복된 패턴과 현재의 갈등을 인식하고, 근본 원인을 찾아 다양한 해결 방식을 찾으며, 갈등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다. 더욱이 용서하고, 화해하며, 성숙한 삶으로 지향하는 것은 갈등으로 인한 탈진을 긍정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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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예배냐? vs 영혼구원이냐?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간혹 세상에서 못되먹은 사람들이 행하듯이 교회 공동체와 가정에서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폭력적 언행으로, 보고 듣는 사람들을 실망케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신앙하는 것은 눈물로 세워가는 우리 공동체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멍들고 어둡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든 기도, 어두운 기도, 슬픈 기도를 드리는 인생이 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기는 이민사회의 동시대에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섬기는 공동체와 가정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즐거이 부르며 할렐루야를 힘차게 높여드리고 가슴 뛰는 벅찬 주일의 감격과 감사의 기도, 자녀를 향한 비전의 기도, 세상을 향한 기쁨의 기도, 영혼을 위한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공동체와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최근 2-3주 동안에 어느 이민교회 리더십 그룹과 목회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작은 관계의 오해가 시작이 되어서 교회를 떠나겠다는 분들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저의 첫 질문은 ‘주일 예배를 정시에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전도를 통해서 새가족들이 처음 방문하게 되어 안내하고 환영하느라 5분 정도 늦게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새가족이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정시예배를 드리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분들이 완전 새가족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이미 우리가 아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은혜로운 공동체가 되려면 기존 성숙한 성도들이 숫자는 더 많겠지만 섬기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소수의 새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자리에 앉게하고 예배를 5 분 늦게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습니다. 해외 선교현장에서 현지인들과 예배를 드리기로 했는데 ‘목사님 금방갑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무쓰, 워먼 마샹 따올러!)’ 라고 말하던 사람이 1시간을 늦게 도착했습니다. 저는 솔직한 심정으로 화가나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지각한 새가족 때문에 주일의 은혜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영성훈련이 안된 그들의 문화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식적인 표현이었습니다.그때에 생각나는 말씀 한 구절, 한 단어가 흥분된 나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영접이라는 말씀이 빨간 글씨로 크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땀을 흘리면서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보다도 더 일찍 출발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늦은 것입니다. 저는 영접이라는 단어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고, 목사라는 사람이 얼마나 속이 좁고 몰인정하고 무자비함을 깨닫고 제 속마음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과 표정에서 나를 사랑해주고 존경하는지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어 주고 기다려 주고 섬기고 나눠주는 삶이 우리 모두를 아름답고 풍성하게 합니다. 5분 늦게 드린 예배를 우리 하나님이 더 기쁘시게 받을 것입니다. 새가족만 이런 실수를 할까요? 우리 모두는 허물도 많고 약점과 실수투성이입니다. 실수를 실수로 인정하고 받아주면 오히려 그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깊고 진한 마음의 감동이 전달될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값어치는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숨 값과 비례합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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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8
    [오피니언] 장세훈 칼럼 - 웃사의 죽음, 그만의 책임인가? (삼하 6:6~7) 크리스천헤럴드2024.11.13
    구약에는 종종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 매우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는 웃사의 죽음이다. 웃사가 수레에 법궤를 싣고 가던 도중 소가 뛰기 시작했으며, 수레에 실려 있던 법궤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웃사는 흔들리는 법궤를 붙들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급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순히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이해한다면 이런 접근은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던져준다. 웃사의 죽음은 과연 웃사 그만의 잘못 때문일까? 다른 누군가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사무엘하 6장 1~8절에 등장하는 웃사의 죽음을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고 강조하려는 논점은 과연 무엇인가?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작업은 본문의 전후 문맥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해당본문에서의 문맥은 다윗의 법궤 이동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려고 하는가?”원래 법궤는 블레셋 족속에게 빼앗겼지만 법궤 앞에서 부러진 다곤 신상 사건(삼상 5:1~4)으로 인해 결국 기럇여아림으로 다시 옮겨진다(삼상 7:1~2).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을 구별시켜 다윗의 때까지 줄곧 법궤를 지키게 했다. 다윗이 왕위에 올라 이방민족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그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서게 됐다. 그러나 다윗은 뭔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궤의 부재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종교적 도시로 확고히 세우기 위해 법궤의 귀환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감행했다. 이 법궤의 이동은 다윗의 통치의 클라이맥스라고 볼 수 있었다. 법궤의 귀환으로 다윗의 권력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웃사의 죽음으로 이런 다윗의 계획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웃사의 죽음은 웃사 그만의 탓은 아니다. 본문의 문맥은 웃사보다도 다윗의 문제를 더 부각시킨다. 다윗이 블레셋을 쉽게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아뢰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하나님께 여쭸을 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싸움의 방식을 알려주셨고, 다윗은 그 방식대로 전투에 임해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대승을 거둔 다윗은 곧바로 법궤의 이동을 추진한다. 놀랍게도 전투를 위한 방식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었던 다윗은 법궤의 이동을 위해서는 전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법궤를 이동할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지침을 전혀 준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궤는 반드시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그러나 법궤 이동을 책임 맡은 다윗은 레위인의 어깨에 메게 하지 않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동시켰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법궤를 레위인의 어깨에 메고 옮겼다면 웃사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크게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첫째, 법궤 이동과 같은 중대한 문제를 시행하기에 앞서 전혀 하나님께 그 뜻을 묻지 않았다. 둘째, 법궤 이동에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지침을 완전히 무시했다. 나중에 수레가 아닌 어깨에 메고 법궤를 이동시킨 다윗의 모습은 법궤를 메지 않고 이동시켜 문제를 초래했던 이전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다윗이 다시는 이전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그러므로 웃사의 죽음을 소개하는 본문의 전후문맥은 웃사의 죽음이 웃사 한 사람의 잘못 뿐만 아니라 다윗의 실수와도 결부돼 있음을 깨닫게 한다.사무엘하 6장 1~8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사무엘하 6장 6~7절만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웃사의 급사는 웃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독자들의 눈에는 부주의한 모습처럼 비춰진다. 물론 웃사가 법궤를 만지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문맥적 상황은 웃사의 죽음이 또 다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본문에 묘사된 법궤의 이동과 웃사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갔던 다윗의 성급함을 엿보여준다. 또한 겸손히 하나님께 아뢰지 않는 다윗의 상태는 이전과는 다른 그의 교만한 모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웃사의 죽음을 다루는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본문의 전후문맥을 통해 웃사의 죽음은 웃사 한 사람의 잘못 외에 법궤의 이동을 성급하게 추진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법궤 이동을 위한 계명도 무시했던 다윗의 문제도 함께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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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정재영 칼럼] 평신도의 의미와 바람직한 역할 크리스천헤럴드2024.10.19
    평신도의 의미 최근 평신도의 역할이 다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한국 교계에서 평신도 교회론이 강조된 것은 1980년대부터지만, 최근 부교역자 기피 현상이 나타나면서 불가피하게 평신도 사역이 더욱 중요하게 됐으며, 앞으로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런데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의 헬라어 표현에서 오늘날의 ‘평신도’라는 말이 파생됐다. 그러나 평신도란 흔히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성직자와 이원화하여 본질 성격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신분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원화 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감에 따라 교회 운영과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돼 교회에는 감독, 장로, 집사들이 나타나 세분화된 직분을 수행하게 됐다.  이와 같은 성직의 변천 과정에서 교회에는 교권 제도가 강화돼 성직자와 평신도를 두 신분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평신도는 교회 운영으로부터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으며, 교회 운영을 전담한 성직자들에게 의존하는 피동적인 계층으로 여겨지게 됐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양분화 된 현상이 수 세기 동안 지속해 오던 중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해 ‘만인사제론’이 주장되면서 이러한 현상이 극복됐다.결국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직자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직무의 차이를 제외하고서는 둘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목회에 필요한 전문 교육을 받고 영성과 관련된 다양한 훈련을 받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춘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고 존중돼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있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일부에서는 평신도라는 말 자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마땅한 말이 없다는 현실의 한계 때문에 계속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신도 신학자인 폴 스티븐스조차 평신도를 다른 말로 하면 ‘목회자 아닌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딱히 한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다.  일부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목회자도 성도에 속하기 때문에 목회자 아닌 성도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서구 교회에서는 평신도 신학과 관련된 교회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속화돼 가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그것을 위해 평신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서구 사회가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탈·세속화됨에 따라 세상에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 또한 사회 환경의 변화와 함께 현대 사회가 다원화, 전문화됨에 따라 목회자 혼자서 모든 사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된 상황도 평신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한몫 했다.  사회의 다원화와 직업의 세분화는 교회 운영의 구조와 형태에서 근본으로부터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다양한 문화와 세계관,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이제 목회자 일인 체제의 교회 운영은 한계에 다다르며 전문화와 세분화를 요구받게 됐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을 방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유휴한 자원으로 남아있는 평신도들을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자원으로 개발·훈련해 동역자로 세울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조직 자체도 더 효율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관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해서 평신도를 부수적인 위치에 고착시키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역할을 이원론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평신도라고 하면 마치 기업에서의 ‘평사원’과 같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이 없는 말단 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신도의 활동을 독려하는 평신도 운동은 종래의 목직자 위주의 교회관으로부터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 혁신 운동의 성격을 나타낸다. 평신도의 자리와 역할 그러나 평신도의 올바른 자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요즘 보편화돼 있는 ‘작은 목자’라는 개념은 평신도를 목회의 동역자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나 자칫 평신도를 교회 안에만 매여 있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요구가 있을 때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특히 부교역자가 부족해지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 평신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교회 사역에 동참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약해지면 교회의 외부 사역도 힘을 잃게 되고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만 매여 있는 것 역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평신도는 오히려 소명을 따라 직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루터가 이야기한 만인사제론도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동등하다는 의미보다는 세상에서 사제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은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세상에 보내졌을 때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체계를 갖춘 훈련을 통해 준비를 시킨 후에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 훈련이라는 것은 단시일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먼저, 사회 참여는 나중에’라는 것은 논리상의 순서인 것이지 시간상의 순서가 아닌 것이다. 평신도들은 이미 세상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성화’라는 표현을 쓰듯이, 신앙 훈련은 일생을 통해서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같은 사회에서 보내는 평신도들은, 전문 목회자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라기보다는 사회인 것이다. 이미 보냄 받은 사회 안의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선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철저하게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회생활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때 평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주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의 사역과 균형 있는 역할에 대해 올바른 시각의 정립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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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가성비와 효율성” 크리스천헤럴드2024.10.19
    사역자로 교회 사역을 처음 시작한 것이 올해로 36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Chef  로서 식당관련 업종에서 일을 한지가 연속으로는 9년째 이며 이전의 모든 식당관련  경력을 다 합하면 대략 15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전혀 쭈뼛거림 없이 누군가가 물으면, 그렇습니다 저는 일터 사역자 입니다 라고 말을한다.한번도 식당의 주인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식당 경영의 가장 큰 목적은, 어떻게 하면 손님을 만족스럽게 하면서도 동시에 식당에 이윤을 많이 남길수 있을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그러기 위해서 따지는 것이 가성비와 효율성 이다. 최소한의 직원을 적제 적소에 투입해서 효율적으로 경영을 해야 하기에, 때로는 경력이 없는 두세사람을 채용하기 보다, 급여를 많이 주더라도 한사람의 경력직을 고용하기도 하고, 식재료에 있어서도 손님들이  만족하면서도 포만감 있게 먹을수 있음에도 재료비가 최소한으로 들어가는 식재료가 무엇일까를 항상 고민한다.교회 사역의 현장에서는 어때야 할까? 놀랍게도 많은 교회들이 일반 비지니스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가성비와 효율성을 교회 사역에서도 적용 하려는 모습들을 보게된다. 이건 아니지 싶다. 이래서도 안되고 이럴수도 없다.장황하게 설명할수는 없지만, 한두가지만 이야기 해 보려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아마도 이 질문을 들으면 자동으로 이런 대답들이 나올 것이다. 영혼구원! 부흥! 그리고 이 영혼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담임목회자 이다.교회가 오랜기간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쇠퇴 하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담임 목회자가 훌륭한 사람으로 바뀌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도 한다. 혹여 여러 이유와 사정으로 담임목사가 공석인 교회들은 어떤가?그 교회들이 제시하는 청빙의 기준을 보고 있노라면, 동의가 되는 부분이 더 많기는 하나 어떤 항목들은 눈쌀을 찌푸리게 하거나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조건(?)들도 적젆게 볼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지원하는 목회자 들이다.지금 현재 사역하고 있는 사역지가 있음에도, 더 나은 조건의 교회로 옮겨가고 싶어서, 본 교회에는 비밀로 하면서 청빙원서를 부끄럼없이 제출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줄 아는가? 오히려 청빙 조건에 현재 사역하지 않고 있는 목회자만 지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상은 정 반대다. 현역으로 사역하는 목사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청빙 광고가 더 많다. 이렇게 까지 해서 수퍼스타급 목사를 모셔와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은 효율적인 영혼구원, 그리고 교회부흥을 위해서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혼구원이, 교회의 부흥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것이 아니다.교회는 세상의 성공 원리와 같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교회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분부하신 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자명하다.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라는 부탁이 아니었고, 제자 된 너희들 이라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라고 부탁하셨음을 잊으면 안된다. 예수님이 친히 비유로 드신 잃어버린 양 한마리에 관한 이야기를 주목하자. 효율성이 아니다. 가성비가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둔 비유 라고도 말할수 없다.이 비유의 초점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한마리의 양은 지금 예수를 믿지않는 세상속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라고 한번 생각해 보길 권면한다. 예수님은 어떤 교회를 보기 원하실까? 수퍼스타 한사람이 교회 전체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며 숫적으로 부흥되는 교회를 더 보기 원하실까? 아니면 교회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모든것을 다 쏱아 부어서라도 한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의 교회를 더 보기 원하실까?더이상 부흥을 얘기하지 말자. 더이상 영혼구원만을 강조하지 말자. 교회는 가성비를 따지는 곳이 아니다. 두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던지, 2천명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던지, 그 공동체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서로를 사랑으로 살리고 든든히 세우는 것 만이 목표여야 한다.지난 주간에 오래 알고 지내던 어느 부부의 요청으로 만남을 가졌다. 대형교회에 오래동안 헌신하고 있는 부부인데, 흔히 하는말로 시험에 들었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기가 매우 불편하다고 한다. 내용이 어떻길래 물었더니, 이 교회가 오늘날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의 가장 큰 요인이 자신이 목회 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그렇기에 자신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도 말했단다.십수년간의 신앙생활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가며, 우린 과연 이 교회에서 무엇을 위해 사역을 했으며 모든것을 드려 헌신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한번에 몰려왔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그 목사도 사랑하신다. 사랑 하시되, 그 목사가 교회를 부흥 시켰기에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요, 남들보다 나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 하시기로 결정 하셨기에 그 의지적인 사랑으로 그 목사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 이라고 말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신다.“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 (요한복음 13장 1절) 라고 말이다.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도 땅 끝까지 가라 라는 사명으로 새겨듣고 있지만, 정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사랑으로)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 이었다는 것을 잊지말자.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은 자명하다.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교회들이  ‘부흥’ 이나 ‘영혼구원’ 이라는 단어만을 붙들고 효율성과 가성비 따져가며 요령부리는 것을 멈추고, ‘끝까지 서로를 사랑하라’ 라는 아가페의 사랑이 너가 아닌 나에게서 보여지기를 가장 바라고 원하신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존재목적도 달라야 한다. 여튼 부흥과 성공은 아니다. 사랑만 있으면 되고, 사랑만 남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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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가장 좋아하게 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0.19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뭐냐고 한 가지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여러가지 중에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자기 주관적으로 소신 행동을 하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한편으로는 싫어하는 것을 먼저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싫어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행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되고 사랑받는 관계가 형성됩니다.하나님과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내 백성, 내 자녀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엄중히 책망하시고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샬롬과 축복하심으로 관계의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회개를 위해서 짐승을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제물보다 우리들 스스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중심으로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제사가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고백합니다(시51:17).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영적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다윗처럼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중심으로 예수님 앞에 회개함으로 죄 사함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쉽게 설명하면, 죄란 하나님을 내 인생의 한 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속한 것으로 주인삼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신양성경에서 예수님도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외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는 항상 예수님 주변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율법을 들이대며 트집을 잡고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이라고 훼방했습니다.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지적하시며 예수님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기쁘게 용납하시고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함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사함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의 죄가 많고 적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누가 더 심각하게 여기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한가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사죄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죄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께만 죄사함의 권세를 주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사하고 주에 품에 안기어 편히 쉬게 된다는 찬송처럼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용서는 조건적인 용서입니다. 즉, 회개를 전제로 하는 용서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 대해서는 용서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을 때에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으로 믿으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롬10:9-10) 고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성경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씀합니다(롬5:20). 죄를 많이 범한 자가 많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자가 더 많이 회개합니다. 더 많이 회개하는 자가 은혜를 더 깊이 깨닫고 더 많이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이 회개하고, 감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는 억만 죄를 용서받은 죄인임을 잊지 말고,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저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죄사함을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입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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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연대책임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10.01
    지난 20일 영국 가디언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19일 아이슬란드 웨스트피오르드에 있는 한 마을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린 북극곰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을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곰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북극곰이 생존을 위해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내려온 것은 기후 변화가 생태계와 동물에게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북극곰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취약한 국가들과 지역 사회는 심각한 경제적, 환경적 재난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지구온난화로 인한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개발도상국과 기후 취약 국가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 환경적 재난에 대한 대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제 사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2023년에 열린 COP28 회의에서 '손실 및 피해 기금(Loss and Damage Fund)'이 도입되었다. 이 기금은 선진국들이 기후 변화로 피해를 입는 국가들을 돕기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로, 기후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보상하고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한다.이 기금을 마련하는 이유는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만일 개발도상국과 취약 국가들이 무너지면, 세계 경제와 환경이 악화되어 결국 선진국들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취약 국가들의 붕괴는 선진국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농업과 식량 공급망, 무역, 글로벌 경제가 서로 연계되어 있어,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기후 재난이 전 세계적으로 파급 효과를 미친다.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해 보면, 대형 교회들이 소형 교회들을 돕는 이유도 소형 교회들이 무너지면 대형 교회들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형 교회들은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공동체를 섬기는 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인구 감소와 노령화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형 교회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대형 교회들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소형 교회와 대형 교회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소형 교회들이 사라지면 교회의 전체 생태계에 타격이 가해질 것이다.따라서 대형 교회들은 소형 교회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지원은 단순히 일회성이 아니라, 마치 선교사들을 돕는 것처럼 꾸준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선교는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인내와 헌신을 필요로 한다. 소형 교회들을 돕는 것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단순한 재정적 도움을 넘어서 그들이 지속적으로 사역을 이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소형 교회들을 돕는 것은 결국 공존과 공생을 위한 노력이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국제 사회의 협력처럼, 교회도 서로 돕고 지원하는 역할을 통해 강력한 연합을 이루고, 더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 교회가 소형 교회를 돕는 것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건강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행동이다. 소형 교회들이 살아남고 그 역할을 다할 때, 대형 교회들도 함께 성장하고 영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교회는 단순히 자기 교회의 영적인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과 생존을 위해 서로 돕고 지원해야 한다. 대형 교회들이 소형 교회들을 꾸준히 재정적으로 지원하지 않으면,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과 발전이 불가능해진다. 소형 교회들이 무너지는 것은 대형 교회들의 생존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형 교회들은 소형 교회들을 지속적으로 돕는 과정을 통해 복음 사역이 지속되고,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공생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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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13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1 – 아펜젤러> 크리스천헤럴드2024.10.01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6일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 기디언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어머니 머리아 거하드(Maria Gehard) 아래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미국 이민의 독실한 신앙 가정에서 자라나 영혼을 위한 목자가 되고, 은둔의 나라 한국에 자원하였다. 그는 아내 엘라 닷지(Ella. J. Dodge)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필자는 그의 사역을 통해 탈진의 세가지 관점을 발견하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세워 남학생을 교육했다. 이화학당은 여성을 대상으로 주로 고아,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을 교육도 선교했다. 1988년 1월은 삼문(한어, 중어, 영어) 출판사를 설립하고,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 신약성서, 영문 월간지까지 발행하며, 한국사회를 알렸는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했다. 1897년 12월 26일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건축했다. 낮이면 교육, 선교, 의료, 출판, 문화 연구, 독립운동 지원 등의 사역을 하고, 밤이면 독서와 기록하는 일을 했다. 그 당시 미국 감리교에서 한국을 방문하여 보니 아펜젤러 혼자서 세 명의 몫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때도 한국에 올 선교사를 모집했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때로는 한국인의 무지 때문에 외국인을 흡혈귀라 하여 몽둥이에 맞고 구타를 당했다. 의료시설이 없던 때라 벼룩, 모기, 이 등 벌레들이 몸을 괴롭혔다. 이동수단도 없어서 말을 타고 평양에 교회를 세울 전략으로 여행하기도 하고, 한국의 문화와 연구를 위해 전국을 탐험하기도 했다. 많은 사역으로 인해 한국에 도착한지 7년만에 27kg이 감소하여 야위고 늙어 있었다. 다방면으로 과도한 신체적 사역과 열악한 환경은 탈진을 가져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아펜젤러는 조선 선교회를 발족으로 현지 부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이 불러오는 부담감을 안을 수 있다. 조선 입성 때는 한번에 올 수 없을 정도로 정세의 불안정과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조선은 지독한 궁핍과 간난, 잔인함과 억압, 무지와 질병, 미신, 죽은 조상들을 존중했다. 여성들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거나 아버지의 빚을 위해 기생으로 팔려갔다. 백성들은 무지하고, 독립정신이 없었다. 서양인들은 폭행을 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1887년 법령에 따라 조선사람이 기독교를 믿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심정과 많은 애국 투사들을 도우며, 위험천만을 감당했다. 그는 참담한 조선인 속에 살아가며, 답답하고 의로운 회의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심리적으로 고갈되었을 것이다.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그는 미개한 나라에서 문화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다.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에도 능통하였을지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며, 서양 문물과 성경을 가르쳐야 했다. 여성을 천시하는 시대에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성벽에서 사람을 광주리에 담아 밧줄로 내려 보내며, 위험을 감수했다. 깊은 잠에 빠진 민족을 자주독립 하도록 힘썼다.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선상 했다가 갑작스런 선박 충돌이 있었다. 자신 보다 남들을 구조 하다가 안타깝게도 생명을 잃었다.그는 17년 선교의 어려운 순간 마다 기도로 극복하고, 주님을 위해 완전히 헌신했다. 탈진을 극복한 것은 신체적으로 철봉과 구기운동을 장려했고, 심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에 조선의 어두운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달라고 간구했다. 미국 본부의 재정 지원과 위로, 그리고 조선 성도의 헌신적 사랑이 격려가 되었다. 그의 어질고 온화한 성격과 사랑은 가정과 타인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먼저 문화적응을 위해 언어를 배우고, 조선문화를 이해하며, 탐구했다. 또한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웠다. 아펜젤러가 탈진을 몰랐을지라도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예수님을 전한 것처럼 영혼을 위한 사랑과 헌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그는 조선에 빛을 비추고 생명을 다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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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무명한 자들! 크리스천헤럴드2024.10.01
    사람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타내는 도장이나 사인(sign)도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칭찬받기 위해 이름이 불려지면 개인의 명예로움과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이름들이 기록된 본문이 여러곳에 있습니다. 그 이름들은 여러차례 기록된 인물도 있고, 단 한 번 기록된 인물도 있습니다. 느헤미야 12:1-21은 1차 포로귀환 이후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명단입니다. 1차 귀환은 BC 536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해는 BC 444년입니다. 그러니까 3차 포로귀환 때 돌아온 느헤미야와 비교하면 92년의 세월 차이가 납니다. 이처럼 오랜시간이 흘렀는데 1차 귀환에 동참한 지도자들의 명단을 뒤늦게 느헤미야가 기록합니다. 그 중에서 20개 가문에 속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명단을 12장에 별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100년이 지난 이름들을 새롭게 거명하고 기록하는 이유는 그들을, 그들의 희생과 수고를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기 위한 목적입니다.느헤미야는 바벨론의 침공에 의해서 파괴된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마음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기록함으로써 그들의 헌신과 수고가 씨앗처럼 땅에 뿌려졌기에 100년이 흐른 지금에 그 열매가 맺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들의 수고와 눈물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예를 들면,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이 ‘바벨론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듯이 그들은 바벨론 생활에 정착해서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버리고 폐허가 된 고국땅으로 돌아와 무너진 터를 재건하는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가나안 땅은 다 무너지고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기업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제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질 하나님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희생하는 헌신자들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가 굳게 세워지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초기 한국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그당시의 상황과 환경도 열악했습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와 음식과 언어가 바뀌었지만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는 수 천명의 선교사님들과 열정과 가족들의 후원과 헌신이 있었기에 세계 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미지의 조선 땅에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내건 희생과 예수님의 사랑을 품은 복음의 씨앗이 시대를 따라서 영혼의 열매를 거두며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느헤미야 시대처럼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세우고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충성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후대에 기억되지 않고 시간 속에 뭍힌, 이름없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 가운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자료가 사라지고 불타고 없어졌을지라도 지금까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숨은 수고의 눈물과 잊혀진 헌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시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고후 6:9)로 그들의 이름을 당신의 마음에 새겨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주시고 기억하십니다(사 49:16).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이름을 가진 성도로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역사에 동참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즉 영적회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재정립되고 회복됩니다.우리는 세상이 기억하는 유명한 자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이름을 가진 성도로서 오늘도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새 역사를 위해 충성을 다해 수고와 희생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속히 날아가는 짧은 인생을, 세월을 아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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